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어깨를 펴려고 해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게 현실이다. 일자리 잃은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 나가도 요즈음 제 정신인 사람이 없다.
해고당한 동료의 빈 자리를 바라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다음은 또 누구 차례일까. 상사가 전화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하긴 상사인들 마음이 편하랴. 오죽하면 해고 대상을 선정하던 상무가 자살을 했을까. 우리 회사는 괜찮을까? 그리고 나라는?
▼ 잔꾀로 현실외면 말라 ▼
퇴근후 동료들과의 대포 한잔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아쉬운 현실이다. 조금만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어깨를 펼 수 있으리오. 더구나 전후에 태어난 중년 세대는 처음 겪어 보는 좌절이며 고통이다. 배고프다는게 뭔지를 모르는 행복한 세대다. 온실에서 곱게 자란 나약한 세대여서 국제통화기금(IMF)충격은 가히 공포요, 공황이다.
스카우트와 고속승진으로 그렇게 기고만장했던 기상이 하루 아침에 풀이 죽었으니 그 뒷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고개숙인 아버지니, 남편 기살리기니 하는 이야기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값싼 동정, 섣부른 격려는 말라. 누구를 탓하는 어설픈 변명은 더욱 금물이다.
우린 지금 누굴 탓할 형편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련이 부른 비극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허황한, 미친 짓을 하고 날뛰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마냥 이렇게 흥청거려도 되는줄 알았다. 아, 하지만 역시 그래선 안되는 것이었다.
이제와서 생각하니 차마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 우리가 저지른 가당찮은 짓거리를 생각하노라면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이 나라의 누가 여기서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앞을 보자. 산 넘어 산, 우리가 넘어야 할 험한 고비는 아직 시작도 안했다는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대단한 전문적인 경제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조금만 냉정히 생각하면 우리가 겪어야 할 고비가 얼마나 멀고 힘들 것인지는 쉽게 해답이 나온다. 생각만으로 앞이 캄캄하다.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이상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최면에 걸릴 수는 있을 것이다. 높은 빌딩은 그대로 솟아 있고 달리는 차, 휘황찬란한 밤거리의 네온에 현혹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아예 술 도박 광란의 디스코에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에 열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잠시의 최면일 뿐 깨고 나면 우리의 현실은 그대로다.
아무리 힘들어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문제의 해결은 철저한 현실 분석, 냉철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움츠린 제 모습이 서글퍼 괜히 잔꾀부리지 말라. 호기를 부릴 것도 아니고 만용을 부릴 일도 아니다. 움츠린 그대로 오늘의 내 모습을 뜯어보자. 그리고 우리가 처한 현실, 헤쳐 나갈 앞을 보자. 왜 고민이 안되랴. 철저히 고민하자. 어찌 잠이 오랴. 밤을 새워 고민해야 한다. 쉽고 가볍게 풀 생각일랑 말자. 그럴 일이 아닌걸.
▼ 많은 난제 합리적 대응을 ▼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전문가의 처방도 없진 않다. 하지만 사탕 발림 처방은 금물이다. 지금 우린 엄청난 시련의 와중에 있다. 알량한 잔꾀로 자기 최면을 해선 안된다. 그런 일시적인 방법으로 풀리기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 쉽게 풀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골몰한다. 그럴 시간이 있거든 더 깊이 고민하라고 권하고 싶다. 뼈 아픈 자성이 있어야 한다. 뼈를 깎는 각오로 이 난국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넘어야 할 많은 난제들을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면도 안되고 외면도 안된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고 내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알리라. 움츠린 개구리가 멀리 뛴다는 것을.
이시형<강북삼성병원 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