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점선/내 가슴에 살아있는 할머니

  • 입력 1998년 3월 2일 08시 10분


내가 맨 첨에 배운 글씨는 내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곧 개성에 두고 온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내가 세살때 피란을 나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집에 남아 집을 지키시겠다고 했다. 늙은이를 뭐 어떻게 하겠느냐고 잠시 피했다 오라고 우기셨다. 길어야 한 달이면 될텐데 뭘 그러느냐고 우릴 위로하셨다. 그러면서 점선이는 여기다 두고 가라고 하셨다. 언니는 피란 안가겠다고 울고 있었고 나는 따라가겠다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두 딸을 양손에 잡아끌고 피란을 나왔다. 동생은 등에 업고 머리에는 이불 보따리를 이고 아버지는 이미 국민병으로 전장에 나가고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할머니하고 헤어지는게 슬퍼서 울면서 집을 떠나왔다.

▼ 서글펐던 피란민 수용소 ▼

한달이 지나고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 우린 마산 피란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었다. 두꺼운 헝겊, 지금 내가 쓰는 캔버스처럼 두껍고 하얀 헝겊으로 커다란 텐트를 치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얇은 헝겊도 벽이 될 수 있고 집도 이렇게 후딱 지을 수도 있구나 하면서 그 속에서 사는게 재미있고 편안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엔 할머니가 그리웠다.

개성에서의 기억은 전부 할머니와 엉켜 있었다. 앞집 아이가 날 물었다. 나는 앞집 아이를 무서워했다. 할머니 치마속에 숨어서 눈만 내놓고 앞집을 지나 다녔다. 궁정학교 마당에 내려앉은 ‘호박비행기(헬리콥터)’를 보러갔고 할머니가 나를 안아서 내 손에 호박비행기 몸체에 닿도록 나를 치켜올려 주셨다. “나는 호박비행기를 만져봤다.”다 자랄때까지 내 의식속에서 되풀이 되는 문장이 그때 내 머리 속에 생겨났다.

한달이 지나도 우리가 집에 오지 않으니까 할머니는 우리를 찾아 떠나셨다고 나는 상상했다. 우릴 찾아 방방곡곡을 헤매다닌다고 나는 여겼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살고 있는 이 피란민 수용소에 꼭 들를 것이라고 나는 기다렸다.

내가 글씨를 쓸 줄 모를 때는 나는 매일같이 헝겊집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집안에 있으면 할머니도 나를 못보고 나도 할머니를 못 볼까봐 늘 집밖에 나와 있었다. 내가 이름을 쓰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우리 집 담벼락인 캔버스에 내 이름을 썼다.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보라고 그렇게 했다. 혹시 내가 없을 때 이 헝겊집 앞을 지난다면 내 이름을 읽고 멈춰서라고 이름을 쓰고 또 썼다. 그 수많은 이름을 읽고 있는 동안에 어디선가 내가 뛰어올거라고 생각하면서 쓰고 또 썼다. 집둘레를 빙빙 돌아가면서 손 닿는데는 한구석도 빼지 않고 내 이름을 썼다. 그렇게 잔뜩 써놓고는 안심했다.

다시 또 공부를 해서 이름말고 다른 글씨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캔버스에 긴 문장들을 썼다. ‘이것은 김점선이 사는 집이다’, ‘이 속에는 김점선이 있다’, ‘이 속에는 또 누구누구도 있다’하면서 식구들 이름을 다 썼다. 개성집 주소도 썼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그날 낮에 뒷 모습이 꼭 할머니 같아서 “어머니”하고 소리치면서 웬 노인을 따라간 얘기를 했다. 우리는 말없이 그 얘기를 듣다가 모두 울었다. 높은 축대를 쌓은 커다란 개울가에 사는 고모네 집에도 할머니하고 갔었다. 개울 바닥에 오리들이 있는데 그 오리들이 밤이면 고모네 집 뒷마당에 있는 오리집에서 잔다고 했다. 그 오리들이 이 높은데를 어떻게 올라올 수 있을까하고 나는 오랫동안 걱정했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피란지 창녕에서 엄마는 유리병 몇 개를 사서 사탕장사를 했다. 장사를 시작한 첫날 하루종일 울었다. 이 사탕을 드리면 할머니께서 얼마나 잘 잡수실까하면서 하루종일 울었다.

▼ 고향방문 가장먼저 신천 ▼

강화도 북쪽 어떤 산봉우리에 올라가면 송악산이 보이고 개성시가지도 조금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는 부산에 살면서도 혼자서 가끔 강화도엘 다니셨다.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나는 새로운 슬픔으로 울었다. 정부에서 고향방문을 신청하라고 할 때 아버지는 제일 먼저 신청하셨다. 그런데 이미 아버지는 삼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노환중이셔서 판문점이고 어디고 여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할머닌들 그 아드님이 돌아가셨는데 살아계실리 만무하고….

고향집 헛간에 매놓은 그네에 내가 앉아 있고 할머니가 내 등을 밀어준다. 내가 재미있으라고 할머니는 내 등뒤에 서서 나를 밀어주신다.

김점선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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