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우리 문화」의 자생력

  • 입력 1998년 3월 18일 19시 29분


경제불황이 문화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문제는 섣불리 결론내리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경기가 나빠지면 문화활동도 함께 위축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벌어지는 현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선진국의 예도 서로 엇갈리게 나타난다. 책의 경우 전체적인 시장감소로 이어진 사례가 있는 반면 문학 예술 철학 등 특정 분야의 도서수요가 크게 증가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음악 연극 등 공연예술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도 일정한 패턴을 찾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불황속에서도 일부 분야에서 문화소비가 증가하는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경제불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비용이 많이 드는 여가활동을 꺼리게 된다. 대신에 독서 등으로 차분하게 재충전의 시간을 갖거나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가족단위로 이뤄지는 문화활동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향락과 소비의 거품이 걷히고 건전한 문화가 자리잡을 여지가 넓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문화종사자 입장에서는 불황이 위기인 동시에 기회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 우리가 겪었던 경제불황과는 비교가 안되는 엄청난 위기상황이다. 불황의 여파가 어떻게 확산될지 현재로선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다른 때 같으면 누구든 붙잡고 하소연하고 나섰을 문화종사자들도 사회 모든 분야의 충격이 워낙 큰 만큼 대부분 속으로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다들 어렵고 힘든 마당에 문화만 특별히 도와달라는 호소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여건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나라는 문화소비국에 불과했지 생산국이나 수출국은 되지 못했다. 영화 음반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출판 공연에 이르기까지 문화에 대한 대외의존도는 다른 산업분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같은 ‘문화 적자’ 현상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불감증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우리의 문화환경은 이같은 기존의 왜곡된 틀을 허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수입 문화의 입지가 크게 좁아진 대신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높아지고 있다.

문화종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선 스스로 문화사대주의에 젖어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곳곳에 있는 문화의 사치와 거품도 걷어내야 옳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문화역량을 키우고 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랫동안 이전 환경에 익숙해진 탓에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외국 것을 베낀다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는 더이상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에 대비할 수 없다. 국제화시대일수록 우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개발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문화가 빈번하게 마주칠 때 강하고 우월한 문화만이 살아남는 것이 문화의 법칙이다.

문화역량을 기르는 데 정부의 지원이나 문화소비자의 애정은 언제나 보조적인 역할이다. 문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역시 문화종사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건을 탓하거나 정부쪽을 쳐다보기에 앞서 사명감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정부가 할 일도 자명하다. 생색내기식의 지원보다는 문화인들이 자생력을 갖도록 문화인프라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홍찬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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