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창]이광희/「유행바람」안타는 러시아인들

  • 입력 1998년 3월 19일 08시 27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한 듯하다. 나의 일 우리 문제를 논하면서 남의 일 남들의 것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이렇게 하니 우리도 그렇게 하지. 오죽하면 옛말에 ‘이웃이 장에 가면 거름을 지고라도 장에 간다’는 말이 생겼을까. 여성들이 화장과 패션을 서로 모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들도 한때 인기드라마 주인공을 따라 푸른색 와이셔츠를 즐겨 입었다.

기업과 정부도 마찬가지다. 몇년전 우리나라의 모재벌 그룹이 외국에 상당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기업로고를 제작했다. 시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영어의 A자를 ∧로 표기한 듯하다. 그후 다른 기업들이 이를 다투어 도용했다. 경쟁관계에 있는 한 그룹 백화점은 세일을 S∧LE이라 써붙였고 어느 자동차회사는 모든 차에 A를 ∧로 표기한 로고를 만들어 붙였다. 러시아에서는 ∧가 L자를 의미하는데도 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와는 반대로 유행을 덜 탄다. 남의 일에 관심도 적다. 대신 자신의 것을 소중히 여긴다. 어느 젊은 여성이 할머니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며 아주 보잘 것 없는 반지를 자랑스럽게 끼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연해주에는 양주가 많이 들어와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연해주산 아르무 보드카를 최고로 친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행이 지난 옷은 헐값에도 잘 팔리지 않았고 비슷한 제품이라도 유명상표가 붙어야 잘 팔렸다. 이웃이 해외여행을 하니 나도 해야 하고 이웃집 자녀가 유학을 가니 우리 아이도 보내야 한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A기업이 차입경영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니 B기업 C기업도 차입경영을 한 것은 아닌지. 이러한 유행병이 소위 한국병 경제위기의 주범은 아닌지.

IMF한파에 살아 남기 위해서도 나의 것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은 버려야 한다. 가장 나다운 것 우리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이상 유행병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정부 기업 소비자 등 각 경제주체들은 자기 분수에 맞게 체중을 줄이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뛰어야 한다.

이광희<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