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기사 문용직 4단(39)은 이들을 향해 일갈(一喝)한다.
“바둑의 패러다임을 알라. 벽은 없다”고.
자꾸 두면 실력이 붙는다고. 그러면 왜 30년, 40년 두고도 ‘만년 5급’인가. 바둑에 대한 ‘깨침’이 없어서다. 절대 벽을 못 넘는다. 프로기사 최초의 박사(서울대·정치학)로 4년간 대학강단에 서기도 했던 그는 거침없이 말한다.
최근 그는 ‘바둑의 발견’(도서출판 부키·값 10,000원)이란 책에서 2천년 바둑 역사를 세가지 바둑 패러다임으로 요약했다. 고대 기보와 저서 등을 치밀하게 수집하고 색인과 인용 문헌을 솜씨있게 정리했다. 어떤 논문 못지않게 공들여 초보자도 쉽게 가까이 하도록 했다. 바둑책 하면 기보만 늘어놓거나 흥미 위주 이야기로 그친 바둑 출판계에는 충격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과학철학자인 토머스 쿤이 학문 용어로 쓰면서 널리 사용된 말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세계관, 혹은 사유(思惟)의 틀에 해당한다.
문4단은 바둑을 보는 눈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나를 이해하는 것이 열 권의 정석 책, 수십 판의 바둑보다 낫다고 자신있게 주장한다.
바둑사상 첫번째 패러다임은 ‘힘바둑’. 삼국지에 나오는 오(吳)나라 장수 손책(孫策)과 여범(呂範)이 남긴 기보를 보자. 한 수 한 수의 착상(着想)을 지배하는 전투 정신, 힘이 느껴진다. 기보의 백8은 현대 바둑에서 보이는 ‘중앙으로 한칸 뜀’ 모양과 같다. 귀에 대한 명백한 침략 의지를 드러낸다. 다케미야(武宮)의 우주류에서 보이는 중앙 중시의 뜻과 다르다. 고대 중국의 바둑과 순장바둑으로 일컬어진 한국의 전통 바둑, 도우사쿠(道策·1645∼1702)이전의 일본 바둑을 지배한 것이 바로 ‘힘의 패러다임’이었다.
바둑 수법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 두번째 패러다임은 ‘구조주의 패러다임’. 부분과 전체는 연결되어 있어 부분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또 전체는 논리상 부분에 앞선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이다. 바둑판 위에서 구조주의는 돌의 효율로 드러난다. 불필요한 돌은 없는지를 따지는 ‘수나누기’나 전국을 제압하기 위해 부분적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 쯤은 현대 바둑에서는 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힘바둑’패러다임이 지배하던 당시에 이같은 개념은 혁명적이었다.
요즘 초보자들이 배우는 3선 중심의 숱한 소목 정석과 포석이론이 이후 등장했다. 구조주의 패러다임은 도우사쿠의 뒤를 이은 슈우사쿠(秀策·1829∼1862)의 ‘마늘모’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구조주의 패러다임은 2백년 이상 기계(棋界)를 휩쓸었다.
세번째 바둑의 패러다임은 ‘중앙 패러다임’. 우칭위엔(吳淸原)과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는 1930년대 ‘신포석’을 선보였다. 핵심은 중앙의 발견. 다케미야는 반상의 조화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는 신포석의 아이디어를 가장 잘 계승한 바둑으로 평가받는다.
중앙 패러다임이 등장한 지 60여년. 문4단은 현재의 한국바둑에 대해 “두터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으나 아직 구조주의 패러다임과 중앙 패러다임이 혼재한 상태”라면서 “새로운 제4의 패러다임 혁명을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문4단의 ‘패러다임 강의’는 바둑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남보다 멀리 보고, 한 발 앞서 가는 비결임을 거듭 강조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창호국수와 조훈현9단이 당대 최고가 된 비결이 있습니다. 바둑 고전(古典)을 누구보다 열심히 보았다는 겁니다.”
바둑 한 수 속에 숨겨진 ‘패러다임’을 터득한 결과라는 것이다. 자, 이쯤되면 ‘바둑 패러다임’에 관심을 갖지 않을 아마추어 바둑팬이 어디 있겠는가.
〈조헌주기자〉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