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중산층을 살려야 한다

  • 입력 1998년 3월 23일 21시 00분


사회가 양극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아래에서 ‘가진 사람들’은 재산을 늘리지만 ‘없는 사람들’은 생계의 바탕마저 잃어가고 있다. 심지어 ‘홈리스(노숙자)’도 늘고 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전국의 노숙자는 3천여명(부랑자 2천여명은 별도)에 이른다. 서울에서만도 이미 2천명을 넘어섰고 하루에 1백여명씩 늘어난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엊그제까지 중소기업을 경영했던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소득이 줄기 시작했고 의식도 빈곤화하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보호원이 전국 2천가구를 조사해 발표한 ‘한국의 소비생활지표’에 따르면 중산층에 속한다고 응답한 가구는 94년보다 10%포인트 줄어든 71.1%였다. 하류층에 속한다는 응답은 94년의 두배인 23.7%에 달했다. 이런 경향은 갈수록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빈곤화가 자녀교육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결과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이뤄낸 빛나는 결실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를 살찌우는 최대의 자양이기도 하다. 중산층의 붕괴는 경제를 황폐하게 만드는 중대한 위협이다. 중산층을 죽이는 것은 자기가 일구고 식량을 얻어야 할 땅을 불태우는 화전민의 어리석음과 같다.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중산층의 몰락은 위험하다. 그동안 중산층은 안정지향적이었다. 사회를 급격히 바꾸려는 세력을 선거에서 거부한 것도, 때로는 친(親)재벌적 정책에 동의해준 것도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빈곤화가 계속된다면 중산층은 변혁지향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중산층이 몰락하면 정치도 사회도 안전판을 잃게 된다.

김대중(金大中)정부가 개혁을 추진하는 데도 중산층의 지지는 불가결하다. 김대통령이 개혁의 기본틀인 노사정(勞使政)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상황의 급박성과 중산층의 개혁지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기의식이 이완되고 자신들의 몰락이 현저해져도 중산층이 지지세력으로 남을 것인가. 오히려 불만세력화하지는 않을 것인가. 중산층마저 등을 돌리면 개혁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정부도 고민하는 것 같다. 실업급여 비적용 실직자 등을 위한 10조원 규모의 사회안전망 구축을 새로 검토하는 것도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노숙자 대책비로 23억원을 지출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액수의 많고 적음 못지 않게 정책기조의 문제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기조는 신(新)자유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IMF가 요구하는 개혁도 그렇다. 경쟁과 시장의 원리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나름의 효험을 입증해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처럼 돼버렸다. 그만큼 한 나라가 예외를 시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세계적으로 강자(强者)의, 강자에 의한, 강자를 위한 ‘혁명’을 불러왔다. 약자(弱者)를 위한 배려는 후퇴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구미(歐美)와도 다르다. 사회보장이 미비한 한국에서 최고의 복지는 고용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중장기적 한국형 복지모델이 더욱 필요해진다. 중산층은 살려야 한다. 개혁과 고통분담에서 중산층만 비켜 있도록 하자는 게 아니다. 최소한 상대적 빈곤의 심화는 막아야 한다. 그것을 시장경제논리에만 맡길 수는 없다. 시장이 완벽하다면 정부도 정치도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낙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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