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섬진강 길]물첩첩 꽃첩첩 「피안의 팔십리」

  • 입력 1998년 4월 16일 07시 50분


천지간에 꽃입니다/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지금 꽃이 피고, 못 견디겠어요 눈을 감습니다 아, 눈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피할 수 없는 이 화사한 아픔, 잡히지 않는 이 아련한 그리움, 참을 수 없이 떨리는 이 까닭없는 분노 아아, 생살에 떨어지는 이 뜨거운 꽃잎들. (김용택의 ‘이 꽃잎들’)

슬픔도 오래되면 꽃을 피운다. 분노도 세월에 곰삭으면 꽃을 피운다. 눈물과 고통속에서 피운 꽃. 봄꽃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구례에서 하동에 이르는 하동포구 물길 팔십리. 강 아래 속세와 강 위 지리산 절집의 피안 사이를 흐르는 강.

산 아래 강변 이곳 저곳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산수유 벚꽃들은 이미 무수한 꽃잎들만 강물에 띄워 놓고 피안의 숲속으로 또다른 꽃세상을 만들려 달려가고 있다. 가슴속에 창날이 우뚝우뚝 서는 날. 대책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날. 가도가도 길이 안보이는 그런 날. 저문 섬진강 꽃길을 따라 간다. 붉은 진달래. 쌀밥처럼 가지에 매달려 있는 하얀 조팝나무. 노란 장다리무꽃. 유채꽃.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서있는 청보리들.

강 건너 저 피안의 지리산. 산꿩 우는 소리. 산벚꽃이 하얀 꽃을 눈부시게 피우고 있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발그레한 개복사꽃. 붉은 진달래. 지리산 허리를 감아도는 강물빛이 갓난 송아지 눈처럼 순하다.

쌍계사 들어가는 벚꽃 십리길은 꽃잎이 난분분하다. 떨어진 벚꽃을 즈려 밟고 절안에 들어서면 대웅전 앞 핏빛 홍도화가 저 세상꽃처럼 서 있다. 연곡사 골짜기는 산벚꽃 세상. 대적광전을 빙둘러 온산이 희끗희끗 아득하다. 절안에 한번 들어서면 다시는 속세에 내려가기 싫다. 천은사는 어떤가. 꽃들은 어디 가고 맑은 대숲바람 소리만 청아하다. 극락보전 앞 좌우에 서있는 수백년 묵은 두그루 동백꽃은 목을 뎅겅뎅겅 잘린 채 땅바닥에 붉은 피를 울컥 토해놓고 있다. 아침 안개에 젖은 화엄사는 피안의 땅. 산벚꽃 왕벚꽃 겹벚꽃들이 물안개에 젖어 물첩첩 꽃첩첩 산첩첩 ‘화엄세상’을 피웠다.

지장암뒤 3백년된 올벚나무가 오랜 운기조식을 끝내고 이제야 꽃눈을 뜨고 있다. 그 바로 옆에는 붉은 동백꽃이 뚝뚝 지고 있다.

봄꽃들은 급하다. 모두들 우르르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 벚나무 조팝나무 복숭아 살구 홍도화….

삶은 꽃이다. 눈물이다. 눈부신 벚꽃은 평생 한번이나 피울 수 있을지 모른다. 토끼풀 엉겅퀴 달래 냉이 씀바귀 민들레 자운영 삐비꽃…. 들꽃같이 사는 것도 쉽지 않다. 평생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무화과처럼 열매 속에서 속꽃 피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슴 속 깊고 깊은 곳에 슬픔과 분노를 한평생 다져 넣었다가 이승을 떠날때 남몰래 붉은 속꽃 피우는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꽃도 없이 열매 맺는 무화과 처럼.

가슴속에 창날이 우뚝우뚝 서는 날. 새벽 물안개에 젖은 섬진강을 따라가 보라.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이승이고 어디가 피안인지. 봄이 참 달다.

▼ 섬진강 먹을거리

봄입맛은 아무래도 담백하고 은은한 게 으뜸. 요즘의 지리산 산나물과 섬진강 재첩국이 바로 이맛이다. 하동재첩국은 섬진강 하류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히는 재첩으로 끓인 것. 국물맛이 시원하고 담백한 게 일품이다. 예부터 숙취해독과 간에 좋다고 소문나 있다. 재첩비빔밥과 재첩무침 재첩회도 있다. 보통 재첩국은 5천원대. 재첩회는 한접시에 2만원선이다.

지리산 산나물은 구례 하동일대 어느 음식점에서나 밑반찬으로 나온다. 봄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나와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돋워 준다.

은어요리는 제대로 맛을 보려면 한달쯤 더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크기가 너무 작아(4∼5㎝) 먹을 수가 없다. 보리가 팰때쯤 돼야 볼펜 크기만한 ‘버들은어’가 돼 먹을 수 있다. 요즘 음식점에 나오는 은어는 양식은어. 은어는 바다에서 동물성 먹이를 먹다가 3월쯤이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다. 강에서는 이끼류를 먹고산다.이끼를 먹고 자란 은어의 몸에서는 수박냄새가 난다.은어회한접시 2만∼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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