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⑥]인터넷 상거래

  • 입력 1998년 4월 16일 19시 31분


“2002년 서울. 장안동에서 중고차 대리점을 운영하는 차씨. 새 모델의 휴대전화를 사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사이버몰(가상매장)인 ‘PC하우스’에 들어갔다.

컴퓨터가 묻는 대로 휴대전화의 용도, 특별히 희망하는 기능이나 가격 등 정보를 입력한다. 모니터엔 세계 각국에서 나온 제품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차씨는 PC하우스가 권하는 모델을 선택하고 전자화폐를 통해 대금을 치른다….”

인터넷 상거래가 얼마나 편리한지 설명하는 사례다. 몇년 기다릴 것도 없다. 이미 서적이나 음반 소프트웨어 판매에선 ‘아마존’ 등 사이버업체들이 이런 방식으로 ‘유통혁명’을 시작했다.

화장품 전자제품 중고차 등 눈에 보이는 제품은 물론 금융 건축설계 기업컨설팅 등 서비스품목도 판매된다.전문가들은 “세계의 소비자들이 상품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편안한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동안 특정 국가의 특정 업체들이 시장을 손아귀에 넣고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정부는 97년7월 “세계 각국 정부는 인터넷 상거래에 간섭하지 말자”는 내용의 ‘글로벌 전자상거래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각국 정부가 인터넷 상거래에 대해 세금을 물리지 말자는 것이 골자.

이 기본계획은 올해 세계무역기구(WTO)의 공식의제로 채택될 공산이 크다. 세계경제의 틀을 바꿔놓은 우루과이라운드(UR)처럼 WTO내에서 이제 ‘인터넷라운드’가 급부상할 차례다.

미국이 ‘민간주도’ 인터넷상거래를 고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분야에선 미국 업계가 세계 최강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 세계에 깔려있는 대형 호스트(본부)컴퓨터중 절반이 넘는 1천11만대를 보유하고 있다.

또 전체 인터넷정보의 90% 이상을 독식하고 있다. 현재 미국이 개설한 사이버 쇼핑몰은 대략 25만개. 일본이나 유럽의 10배 규모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미국 업체에 맞서 싸울 업체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각국 정부가 관세를 물려 자국시장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미국산 음반 컴퓨터소프트웨어,지적재산권 등이 세계시장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 국내 네티즌도 이미 인터넷을 통해 미국업체의 컴퓨터소프트웨어를 주문하고 신용카드로 돈을 치르고 있다.

프랑스 언론인 장 귀스넬은 ‘가상공간 전쟁’이란 저서에서 “무주공산(無主空山) ‘사이버대륙(인터넷시장)’이 미국에 점령당하고 있다”고 갈파했다. 실제로 유럽 각국의 우려는 심각하다. 그래서 유럽측은 미국의 ‘무관세’주장을 일단 거부했다.

미국 다음의 인터넷 강국 일본은 이미 미국 주장에 동조했다. 최근 일본 통산성이 내놓은 전자상거래 보고서에는 ‘노인까지, 즉 국민 모두가 인터넷 상거래를 활용하게 교육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한없이 확장되는 사이버시장의 한 구석이라도 차지하기 위한 것. 유럽도 일본처럼 결국은 미국과 타협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서경대 김갑수(金甲洙·전산학)교수는 “각국이 준비하는 인터넷상거래 시스템은 이미 미국의 카드회사 소프트웨어업체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자국실정에 맞게 약간 변형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식 인터넷상거래 시스템이 사실상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인터넷 상거래 세계표준이 만들어지면 ‘지구촌 상권(商圈)’이 태어난다. 세계 어디서든 인터넷만 연결하면 사이버몰에 전시된 세계 각국의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래이익의 상당부분은 사이버몰의 주인, 즉 미국업체의 몫.

삼성경제연구소 노재범(盧在範)수석연구원은 “인터넷 상거래엔 비행기로 상품을 배달하는 항공배송체제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전세계에 항공 수송망을 갖춘 DHL 페더럴익스프레스(FedEX) 등도 미국업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인터넷 상거래 세계표준이 일반소비자와 기업간의 거래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무역과 같은 기업간의 거래나 정부조달시장 등 모든 형태의 상거래가 인터넷을 통하도록 한다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다. 97년 2백44억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터넷시장규모가 2년 뒤 10배로 불어날 것이란 전망에 전문가들은 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한국의 ‘사이버전쟁’ 준비는 어떻게 돼가나. 세계적인 인터넷상거래 전문가인 랜디 화이팅 코머스넷USA 회장은 최근 “한국의 위기탈출은 전자상거래 육성에 달려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경제구조개혁을 시도하는 마당에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인 인터넷상거래 체제로 전환해 경쟁력을 갖추라는 충고다. 그러나 현실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96년 국내 두번째의 통신서비스업체인 데이콤 주도로 설립된 ‘코머스넷 코리아’를 보자. 미국 등 23개국의 인터넷상거래 시스템 관련 정보를 얻어 국내에 전파하는 게 목적. 국내에선 삼성전자 등 전자업체와 카드사 은행들이 참여해 5월에 시험가동한다.

그러나 가장 큰 통신서비스업체인 한국통신은 “데이콤이 회장사로 있는 한 그 밑에서 일하기 어렵다”며 불참했다. 한통은 독자 개발에 나서 8월 별도의 시스템을 선보인다. 업계에서는 “양측이 힘을 합쳐 시스템을 구축하면 가입회사도 늘어나고 시스템 오류를 줄이는 데도 유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부처들도 따로 논다. 지난해 통상산업부(현재 산업자원부)는 ‘산업내 전자상거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전자상거래기본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정보통신부쪽에서 “유엔의 관련 법규를 짜깁기했다”는 비아냥이 터져나왔다.

선수를 뺏긴 정통부는 최근 ‘전자서명 인증기관 설립이 우선’이라며 전자서명법안 마련작업에 나섰다. 결국 양측 법안을 추후 종합하기로 의견절충이 이뤄졌지만 한시 바삐 세계표준을 따라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시간만 허송한 셈이다.

〈박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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