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나의 고향은 서울이었다. 그리고 내 고향 채송화꽃 핀 서울의 한 귀퉁이에는 나와 봉순이 언니가 있었다.
내 머리 속으로는 마치 조감도보다 더 선명히 아현동의 산동네가 떠오른다. 지금 당장 외투를 걸치고 찾아가라 해도 골목 하나 틀리지 않고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선명한 동네.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진 산비탈길. 돌과 가마니에 싸인 흙으로 이어진 계단들. 버드나무가 서 있던 집골목. 토끼장처럼 붙어있던 지붕 낮은 집들. 깊은 우물 속에 신기하게도 빨간 금붕어를 키우던 절름발이 할머니댁. 아침이면 보라색 나일론 망태기를 들고 시장으로 일하러 가던 아낙네들. 나보다 열배는 커보였지만 늘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던 지금은 이름도 잊은 어떤 사내.
나는 거기서 나서 거기서 자랐다. 미국유학 준비 중이던 무력한 아버지와 고생 모르고 자라 이 가난이 끔찍하기만 해서 예민할대로 예민해진 어머니. 이미 커서 초등학교엘 다니던 언니와 오빠, 그리고 봉순이 언니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봉순이 언니였다. 실망스럽게도 태어난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려준 것도 그녀였고, 나를 낳느라 몸이 약해져 버린 어머니를 대신해 핏덩이를 안고 잠을 설쳤던 것도 그녀였다. 그때 봉순이 언니 나이 열세살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난 집은 대문을 열고 삐뚤삐뚤한 계단을 열개쯤은 내려가야 현관이 나오던 곳이었다. 오른쪽으로는 커다랗게 주인이 사는 안채가 있고 그리고 그 안채 못미쳐서 왼편으로 방이 두칸 있는 낡은 양철지붕집이 우리집이었다. 안집 마당엔 벌겋게 녹슨 양철드럼통에 뿌리를 박고 자라던 석류나무가 있었고 그 석류나무 아래에는 언제나, 가을이면 그 집으로 들어와 다음해 여름이면 어김없이 잡혀 먹히던 누런 강아지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 집에 이사와 벌써 여러해를 ‘집 주인의 착한 마음씨’ 덕에 어려운 삼십대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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