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지명관/『이젠 바그너의 음악을 꺼주오』

  • 입력 1998년 5월 3일 19시 32분


금년은 엘니뇨 현상 탓인지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거의 때를 같이하여 활짝 피었다. 지금은 철쭉과 라일락이 한창인 정말 화려한 봄이다. 그런데도 우리 근대 시인들은 김소월(金素月)에서 보는 것처럼 어째서 이런 화사한 봄을 슬프게 노래하였을까. 왜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님에게 ‘진달래 꽃’을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린다고 한 것일까.

지난달 중순 저 악명 드높은, 자기 동족을 2백만명이나 살해한 폴 포트가 죽었다. 사진으로 늙어서 지친 그의 얼굴을 보며 어떻게 저런 노인이 그렇게도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불교를 이어오면서 평화를 사랑한 캄보디아에서 말이다.

▼ 현대사의 참극 밝힐때

나는 ‘아우슈비츠 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한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생각했다. 소설가 귄터 그라스는 6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해 놓고 어떻게 시인이 이 세상과 인간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겠는가라며 아도르노에게 공감을 표했다.

한편 아도르노는 그라스의 대답을 듣고 더욱 심각하게 아우슈비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 후에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살아가려면 냉혹해야 하는데 그러한 냉혹성이 바로 아우슈비츠의 살육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악몽’에 그는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폴 포트의 대학살 후에 캄보디아 국민은 자기네 민족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네 민족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근대사에서도 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3·1절로 시작해 제주도의 4·3을 거쳐 6·25에 이르기까지 슬픈 회상이 이어진다. 마치 쓰라린 추억의 장소를 탄식 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봄이 되면 우리는 지난날 펼쳐졌던 비극을 하나하나 더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5·18에 이르면 18년 전 그날에 너는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온다. 이런 물음은 살아 남은 사람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아도르노는 생각했다. 정말 5·18 이후에 우리 민족을 자랑스러운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민족에 가혹했고 냉혹했던 것은 아닌지.

극단적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민족사적인 물음을 회피해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너무나 다급한 일이 많지만 그러나 우리 근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영혼들이 고이 잠들기 위해서도 언젠가는 적어도 그 모든 역사를 밝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누구를 탓하고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묻어버린 사실을 사실대로 발굴하고 기록하자는 것이다. 바른 민족사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그 참극을 불러일으킨 이 민족의 ‘냉혹성’을 극복할 수 없다.

아도르노는 총 맞는 희생자들의 절규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치 친위대들이 밤새 거대한 확성기를 동원해 바그너의 음악을 흘려보낸 것을 회상했다. 그리고 남은 자가 자신에게도 깃들여 있는 ‘냉혹성’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아직도 그 요란한 음악소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역사규명위원회」 설치를

그러한 ‘냉혹성’의 역사를 반전(反轉)시키고 정의(正義)를 되찾기 위해서는 그 잔인한 음악소리를 제거하고 그 아래 묻혀 있는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잔인한 봄에 ‘역사규명위원회’같은 기구의 설립을 검토할 때가 왔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다. 단지 역사가들만이 아니라 사회학자도 정치학자도 언론도 법조계도 일반시민도 참여하는 그런 위원회 말이다.

새 정부는 적절한 시기에 안기부나 법정이나 정부 모든 기관의 문서를 공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국민의 정부’가 해야할 일이고 그래야 ‘국민의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지명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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