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6)

  • 입력 1998년 5월 6일 07시 33분


지금도 그 느낌만은 생생한데 나는 아주 느리게 마치 태아가 양수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듯 부드럽게 가라앉고 있었다. 놀란 것은 오히려 나를 잡아채는 아낙들의 억센 손 때문이었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산발을 하고 몰려있는 목욕탕이 한바탕 소란해졌고 언니는 비누거품이 다 가시지도 않은 머리를 보기싫게 풀어헤치고 나를 아프게 껴안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고 나는 소스라치게 울기 시작했다. 언니는 이제 막 봉곳이 돋기 시작하는 젖가슴에 미끈미끈한 비눗기를 다 씻어내지도 않은 채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언니의 머리칼에서 헹구어내지 않은 비눗물이 내 얼굴로 뚝뚝 떨어졌고 눈가가 쓰려왔다. 나는 언니를 거세게 밀쳐냈다. 언니는 그것이 비눗물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나의 원망 때문인 줄 알고는 미끈미끈한 가슴에 나를 더욱 비벼대면서 어쩔줄 몰라 했다.

―짱아 괜찮여…이 일을 어쩐댜…세상에 내가 미친년이지…내가 잘못했어 짱아….

그날 저녁 식구들이 모인 저녁식사에서 내가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재잘거리지 못했던 것은 언니가 지레짐작하는 바대로, 내가 어린 나이에도 자기를 생각해주는 기특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저녁 언니와 오빠 그리고 봉순이 언니까지 식구수대로 밥을 푸고 어머니는 저녁 생각이 없다시며 나를 들추어 업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아마 낮에 겪었던 일들 때문에 몹시 피곤했었는지 밥을 달라는 말도 잊고 엄마 등에 묻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깨어보니 모래네 이모댁이었다. 엄마보다 손 아래인 이모의 얼굴이 보였고 어머니가 막 숟가락을 놓고 계셨다.

―짱아도 밥먹자. 어여.

이모는 내게 숟가락을 쥐어주고는 전구에 끼워 깁던 이모부의 양말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래 봉순이 그 철없는 것이 솥이 텅텅 빈 것도 모르고, 언니가 먹을 밥까지 다 먹었단 말이야?

―어떻게 하니? 그 나이에 저도 배가 고프니까 모른 하는 거겠지. 저번 주인 집에서 그렇게 애를 굶겨놔서 걘 밥이 하늘이야. 밥 푸면서 밥알 하나 흘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내 눈치를 보는지. 내가 그러지 말라고 일러도 그게 안돼. 사실 내가 걔를 열살 때부터 데리고 있었으니 딸이나 마찬가지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봉순이 언니는 내가 태어나는 것도 보았다고 했다. 난산의 고통이 오래 가는 엄마를 위해 모셔온 의사가 부르기에 방으로 들어가 보니 사과처럼 새빨간 얼굴을 한 아기가 있었는데 그게 나라고 했었다. 엄청난 난산 끝에 어머니가 나를 낳고 사흘만에 위경련으로 쓰러졌을 때 버스로 다섯 정거장이나 되는 길을 뛰어가서 의사를 불러온 것도 언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가 있기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살아서 도망치고 쓰러지고 배고프고 했다는 걸 처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 집도 그렇지. 교회 집사라는 사람들이 집도 멀쩡하게 살면서 애를 굶겨? 참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니까. 지난번에 언니가 그 집에 세들어 살 때도 얼마나 못되게 굴었수.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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