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영화에서는 못된 남자들이 날뛰면 영웅적인 남자주인공이 나타나 무찌르고 평화를 찾아주었지만 이제는 불행히도 그게 불가능하다. 이들 악남(惡男)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탕아’처럼 사랑하는 여인의 눈물에 의해 개과천선 하거나 구원받는 일도 없다. 한번 악한은 영원한 악한, 이들 반(反)영웅이 되레 20세기말 대중문화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주말 개봉한 한국영화 ‘토요일 오후2시’의 건달 역 김민종. 멀쑥한 외모 하나로 돈많은 여자를 후리는 것이 그의 직업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승연을 떼어버리려고 욕설을 퍼부으며 때리는 장면은 소름끼칠 정도다.
“보통 영화에서는 아무리 나쁜 남자라도 사랑의 힘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과연 그럴까?”
민병진감독은 ‘덜 영화적으로’ 만들고 싶어 남자주인공을 악한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주류에 끼여들 수 없는 밑바닥 인생, 남을 배려해서는 도저히 살아남지 못하는 IMF상황적 인간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더 심하다. 23일 개봉되는 ‘터뷸런스’. 처음엔 누명을 쓴 것처럼 보이는 남자주인공(레이 리오타 분)이 알고보니 금발여자만 잇따라 죽인 엽기적 강간 살해마였다.
아무리 나쁜 인간이더라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여자(로렌 홀리)한테 감화될 것이라는 관객의 기대는 여지없이 배반당한다. 결국 연약한 여주인공은 슈퍼맨이나 타잔, 아니면 뽀빠이를 부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싸워 이겨야 한다. “개자식아, 덤벼. 겁안나!”하면서.
‘재키 브라운’ ‘도베르만’ 등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들도 하나같이 나쁜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도 인종차별주의자 강박증환자에다 독설가 역이었다. 사랑에 빠져도 그의 독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영화는‘이렇게 못된 남자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영화평론가 이수연씨(한국외국어대강사)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남자주인공은 강하고 선하며 문제를 해결한다는 고전적 영화서술구조가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더구나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남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과감하게 저지르는 세기말의 ‘나쁜 남자들’을 이들 안티 히어로(Anti―hero)는 다소 과격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
〈김순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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