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1)

  • 입력 1998년 5월 12일 07시 08분


―아버지 고맙습니다 해야지.

누군가 나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어서, 아버지 해봐….

나는 할 수 없었다. 왜 저 사람이 아버지인가, 봉순이 언니처럼 우리집에 살았던 것도 아니고, 어머니처럼 밥을 해주는 사람도 아닌데…. 난데없이 나타나서 아버지라면 그러면 아버지인가 말이다. 그래도 어른들이 어서 인사를 하라고 윽박지르자 나는 마치 누군가가 나를 납치라도 해 가려는 위기를 느낀 것처럼 악착같이 봉순이 언니의 목덜미에 매달리며 울었다.

―우리 아버지 데려와! 짱아 아버지 말이야…. 언니하고 오빠 아버지 말구!….

어른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나는 끝내 아버지에게 한번의 손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저녁, 왠지 모를 배신감에 사로잡혀서 봉순이 언니의 등 이외에는 어떤 자리도 거부했다. 어머니가 안계시는 날이면 언니와 오빠는 봉순이 언니와 나를 두고 심술을 부리곤 했었다. 오빠는 내가 자기의 공책에 낙서를 해놓았다고―나는 분명히 글씨 연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나를 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언니 또한 자신의 종이인형 목을 내가 못쓰게 만들었다고 나에게 다시는 인형을 보여주지 않았다. 봉순이 언니가 그건 짱아의 짓이 아니라고 변명을 했지만 언니는 봉순이 언니를 향해 눈을 파르스름하게 뜨고는 말했다.

―식모 주제에 웬 참견이야?

봉순이 언니는, 우리 언니보다 힘도 세고 키도 컸던 봉순이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봉순이 언니를 따라 부엌에 들어가자 언니는 얇은 시멘트를 바른 부뚜막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식모주제야 언니는….

봉순이 언니가 우리 언니의 그 말 한마디에 풀이 죽는 모습이 사실은 재미가 있어서 나도 우리 언니의 말을 따라 봉순이 언니에게 야멸차게 내뱉어 본 것이었다. 부뚜막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언니는 잠시 망연한 표정을 짓다가 그만 웃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언니는, 봉순이 언니는 오래오래 울고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가 돌아온 그날, 언니는 결국 서서 밥을 먹었다. 하지만 서서 밥을 먹으면서도 언니는 손을 뒤로 돌려서 내 입에 녹두전이며 물에 씻은 김치에 싼 조그만 제육을 넣어주었다. 나는 물론 날름날름 그것을 받아먹고 언니의 등에서 잠들었다. 나를 놀리기만 하는 언니와 오빠를 대신해서 이제 아버지가 나의 편이 돼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내게 남은 것은 봉순이 언니뿐이었다. 그녀만이 우는 나를 달래주었고, 그녀만이 내 잠자리의 베개를 고쳐 놓아주었다. 그녀는 나와 마주친 최초의 세계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오고 봉순이 언니가 가져다 놓은 새까만 벌레들이 우리집 낡은 문틈으로 사라졌어도 우리집은 부자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받아줄 취직자리는 없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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