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 (12)

  • 입력 1998년 5월 12일 19시 24분


아버지는 아침이면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고 낡은 가죽가방에 미국에서 받은 학위증을 소중하게 챙겨갖고는 밖으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고주망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면 으레 어머니와 한판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답답하다구! 답답해서 그래!

아버지는 어머니와 수군거리다가 드디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소리는 안방의 누런 문창호지를 넘어 우리 형제들과 봉순이 언니가 쓰는 방까지 날아왔다.

―누군 안 답답한 줄 알아? 그러니 술좀 작작 먹으라구. 유학까지 갔다 왔으면 취직을 해야 할 거 아냐!

―자리가 없는 걸 난들 어떻게 해! 주야간 뛰고 쌀 한말도 안되는 월급 받는 그 교수자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당신은. 내가 그러려고 쌔빠지게 미국까지 갔다온 거야?

―미국유학 갔다왔으면 다야? 새끼들하고 당장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난들 시장에 나가고 싶어서 나갔었나, 나도 일제시대때 바나나 먹고 큰 사람이야, 왜 못해? 앉아서 굶어죽는 것보다 낫잖아? 당신은 삼년 동안 미국에서 호사스럽게 살았는데, 난 이게 뭐야?

―호사라니? 내가 뭐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미국에서 파티하고 왔는 줄 알아? 당신 보내주는 돈 아껴쓰려고 창문도 없는 지하방에서 매트리스 하나 깔고 살았어!

어머니는 지난 가난의 분풀이라도 하는 듯 소리를 질렀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자리끼 물그릇을 들어 방 바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 그 놋으로 만든 대접이 툇마루 앞 흙바닥에 나뒹굴어지면 그쯤에서야 소동이 끝나곤 했다.

―괜찮아 짱아, 괜찮아….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나를 안으며 봉순이 언니가 말했다. 그래도 내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므로 봉순이 언니는 천장이 낮은 그 방에서 나를 업고 서성거렸다.

―옛날에 말이다. 망태 할아부지가 살았댜. 망태 할아부지는 키는 저기 한길에 서 있는 전봇대만치 컸는데, 밤만 되므는 국사발만큼 큰 눈을 뜨구설라므는, 누가 아직 안자구 있어, 누가 밤에 안자구 울구 있어! 해믄서 집집마다 창을 기웃거린댜, 그러다가 안자구 있는 애가 있으므는 커다란 집게로 아이의 목을 터억, 하니 잡아서는 등에 지구다니는 집채만한 망태에다 아이를 휘익 던져 넣는다는겨, 그렁께 울지 말어어….

평소같으면 두려웠겠지만,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소리보다는 망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덜 무서웠다. 부모가 싸우고 있는 소리를 듣는 어린 날은 인생이 얼마나 비관적이었던지,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왜 그렇게 하나도 없어보였던지. 언니는 내 궁둥이를 두들기며 말하곤 했다.

―괜찮아, 우린 꼭 부자가 될 테니께. 그러믄 우리는 주인집에서 살게 될 거구 아줌니가 나두 핵교에 보내준다구 했어. 정식핵교는 아니드락두 글씨두 가르쳐주구, 옷 맹그는 것두 가르쳐주는 그런 핵교 말이여.

그때 건넌방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아버지가 신을 신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 그러고 나면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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