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3)

  • 입력 1998년 5월 13일 19시 28분


엄마가 운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안이었는지, 봉순이 언니의 뜨뜻한 등에서 까무룩 잠이 들려던 나는 화들짝 놀란 듯 깨어났고 다시 울었다.

―야가 오늘따라 왜 이리 안자고 그랴, 그랴길.

언니는 몇번 더 망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업고 살며시 집을 빠져나왔다. 화강암으로 이어진 축대가 긴 골목길, 드문드문 달려서 골목길을 비추고 있는 외등에 의지해 걷다가 언니는 사람들이 한길이라고 부르는 만리동쪽 큰 길로 나를 데리고 나왔다. 길은 환했다.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상자에 가지가지 색깔의 눈깔사탕을 담아 팔던 가겟집은 아직도 문을 열고 있었고, 굴속같이 생긴 목포집에서는 남자들이 두런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빨래처럼 흰 국수를 널어둔 국수집에서는 아직도 다 마르지 않은 흰 국수들이 부드러운 저녁바람에 가늘게 떨며 마르고 있는, 봄밤이었다.

―봉순이 아니야?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리어카를 개조해서 만든 의자도 없는 포장마차에서 선 채로 막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포장마차 좌판 위에는 포크대신 옷핀으로 꿰어진 해삼과 멍게들이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이상하게 윤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자씨, 또 술 드세유?

―그래. 왜 안자구 나왔냐?

아버지는 언니의 등에 업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봉순이 언니의 등에 묻었다. 아버지가 옷핀에 꿰인 작은 해삼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우리 짱이가 이거 먹을 줄 아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무안스레 손을 봉순이 언니에게 내밀었다.

―봉순이, 이거 하나 먹어 볼테냐?

봉순이 언니는 한손으로 내 엉덩이를 받친 채 다른 한손으로 아버지가 내민 그 까맣고 윤기 나는 해삼을 받아 날름 먹어치웠다.

―더 먹어라. 너도 한참 클 나인데….

언니는 아버지의 말에 얼굴을 약간 붉히면서도 아버지가 내미는 해삼이며 멍게를 날름날름 먹어치웠고 아버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카바이드 불빛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마르고 단정한 실루엣이 카바이드 불빛에 비치자 나는 아버지가 신성일보다 잘 생겼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너무 야멸차게 대한 것이 좀 후회도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의 나이 삼십대 초반, 벌써 세 아이의 아버지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봉순이 언니까지 거느린 가장, 은행보증을 잘못 서서 몰락한 할아버지의 아들이며, 지금은 남대문에 큰 점포를 가지고 있는 처가 덕에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온, 그러나 오기와 자존심을 가진 유교 집안의 장자, 그러나 또 한편 현실 속에서는 한없이 무력한 후진국의 젊은 지식인이었다. 아버지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내가 떨어뜨려 놓고 갔던 자식이 벌써 이렇게 똘망똘망해졌구나, 하는 대견함, 또 한편 이렇게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아이들을 내가 정말 다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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