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5)

  • 입력 1998년 5월 15일 19시 29분


아버지는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술에 그랬고,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현실에 그랬고, 아버지 말대로 지하방에서 고생하며 산 시절이었지만 짧은 유학동안 맛본 선진국의 경험에 취해서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산꼭대기 동네에 방 두칸을 얻어 사는 이 현실, 의자도 없는 포장마차에 서서 옷핀으로 꿴 해삼에 막소주를 먹는 현실이 정말 비참한 표정이었다. 운전사는 계속 대꾸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취한 얼굴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깎지 않고 자란 아버지의 수염이 내 뺨에 아프게 닿았다. 나는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다. 봉순이 언니가 그런 나를 받아 안았다. 차는 남산 길을 오르고 있었다. 흰 벚꽃이 만발해서 연분홍 등불을 밝혀 놓은 것만 같았고, 그 나무들 밑에 마치, 저도 꽃이라는 듯 솜사탕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의 환한 치마저고리 빛깔이 몽환처럼 그 주위를 천천히 오갔다. 벚꽃을 보아도 봉순이 언니는 이제는 겁먹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담배를 한대 꺼내 물더니 창문을 열고 연기를 내뿜다가 말했다.

―봉순이 넌 나 없는 동안 아주머니 말씀 잘 들었니?

―야.

봉순이 언니는 수줍은 듯 엷은 곰보자국이 있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래, 우리집에서 곱게 있으면 아저씨가 좋은 데 시집 보내주마.

봉순이 언니는 빨간 잇몸을 드러내고 히히, 웃었다. 아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짱이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아비로서만 생각한다면 네가 이 다음에 그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가면 그뿐이다 하는 마음도 있지만, 세상은 변할 거다. 남자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훌륭한 여자들이 많이 나올 거야. 넌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양여자들처럼 남자들하고 대등하게 토론도 하고 대학 강단에도 서고 그런 여자말이다. 이 아빠가 말이야, 아직은 힘이 없지만, 꼭 짱이를 그렇게 키울거야. 알겠니 우리 짱이.

아버지는 여전히 봉순이 언니의 품에 안겨 있는 내 졸린 궁둥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언니의 벌레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드디어 취직이 된 것이었다. 외국인 회사라고 했다. 월급도 많이 주고 자동차도 주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이틀씩이나 공휴일인 회사. 전 세계에 지사를 두고 있는 회사인데 유망한 나라를 찾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겨룬 끝에 한국에 지부를 설치한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기사가 딸린 자동차가 나왔지만 우리집 앞까지 차가 들어올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 차를 계단이 많은 집 앞에서는 탈 수가 없어 십분쯤 계단을 걸어 내려가 아현초등학교 건너편 큰 길에 대기해 있는 자동차에 올라타고 회사로 떠나곤 했다.

그리고 어느날 리어카가 집 앞에 두어대 오고 우리는 그보다 좀 아랫동네로 이사를 했다. 담이 높은 큰 집들이 한쪽으로 줄지어 있고 서너 발짝 건너편에는 다닥다닥 붙은 지붕 낮은 집들이 늘어서 있는 묘한 동네였다. 아현동쪽에서 만리동쪽으로 올려다보자면 오른쪽 줄이 한옥줄이었고 왼쪽이 토끼장처럼 지붕이 낮은 집들이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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