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칼럼]과거에만 얽매일 것인가

  • 입력 1998년 5월 17일 21시 09분


나라의 어려운 사정을 생각할 때 밖에 나오기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몇해 전부터 져온 말빚 때문에 부득이 파리와 런던을 오고가면서 두 주일째 머물고 있다. 파리에는 송광사 분원이 있고 영국 데번의 톳네스에도 송광사를 거쳐 간 현지 불교학자 부부가 운영하는 명상센터가 있다.

밖에 나와 한동안 안 보고 안 들으면 우선은 마음이 편하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치와 경제, 사회현실이 우리에게 큰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산속에 있을 때보다 산을 벗어나 바라볼 때 산의 실체가 더 잘 보이는 그런 시각에서다.

▼ 책임공방 정치권에 분노 ▼

시간을 내어 일부러 파리의 오페라 거리에 있는 대형백화점 ‘갤러리 라파에’에 들렀었다. 가본 사람이면 알고 있듯이, 그 백화점에는 우리나라 고객을 위한 ‘한국인 안내 데스크’가 따로 설치되어 있다. 전에는 손에손에 물건 꾸러미를 든 우리나라 관광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어 시끌벅적했는데, 요즘에는 안내원 한 사람만 달랑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한산하다. 파리 시내에는 우리 교민들이 경영하는 한국식당이 서른 곳이 있는데 IMF사태 이후 식당마다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고 있을 정도로 썰렁하다고 한다.

초파일 다음날 한국문화원에서 강연을 가졌는데 교민과 유학생들로 강당을 가득 메웠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국내현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 유학생이 들고 온 최근 국내 신문을 펼쳐 보고,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우리는 함께 분노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집안에 불이 붙어 훨훨 타고 있는데도, 불끌 생각은 하지 않고 당리당략에만 안주하면서 책임논쟁만을 하고 있을 때인가. 불이 난지 벌써 반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이렇다 할 진전도 없이 책임공방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니, 이 나라 정치인들의 자질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살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어 온 국민에게 생계의 위협을 가져오게 했으면서도 책임질 주체가 없다니 말이 되는가.

과거의 정권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종말을 가져왔는지, 현정권은 역사인식의 투명한 안목을 가지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 과거에 얽매이면 미래가 어둡다. 소위 문민정부가 신한국을 깃발로 내세웠으면서도 그 신한국을 이루지 못한 채 좌초하고 만 것도, 개혁을 빙자하여 지나간 과거사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다.

물론 밝힐 것은 밝히고 따질 것은 따져야겠지만, 거기에 매달리면 우리 모두가 이 혼미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함께 침몰하고 말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의 그때 그 열기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국정을 펼쳐야 한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한다.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

밖에 나와서 보면 선뜻 눈에 띄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거리와 길목마다 꽃이 많다.

창문 밖에도 이웃과 행인들을 위해 화분을 놓아두는 그 마음씨가 참으로 꽃답다. 우리나라에도 집집이 꽃을 가꾼다면 우리 현실과 미래가 훨씬 밝아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들이 조금만 마음을 쓰면 가능한 일이다. 가족과 사회의 정서순화를 위해서라도 해봄직한 일일 것 같다.

▼ 미래지향적 국정펼쳐야 ▼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모두가 검소한 옷차림과 맨얼굴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얼굴은 화장이 너무 진하고 두껍다. 맨얼굴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돈을 들여가면서까지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빚쟁이들 주제에 세계에서 화장품을 많이 수입해다 쓰는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의 일부를 나누어 꽃을 가꾸는데 기울인다면 우리 삶이 보다 향기롭고 부드러워질 거라는 생각에서 말을 한 것이다.

(파리에서)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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