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이슈/日王호칭 天皇으로]윤덕민/형식논리서 벗어나야

  • 입력 1998년 5월 18일 06시 57분


유학시절 한 미국인 친구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한국은 왜 천황을 갑자기 일왕으로 부르기 시작했느냐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물론 과거 일본이 저지른 일들을 상기하면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미국인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0년대말 민주화의 열기속에서 우리는 갑자기 천황을 일왕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일왕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사후(事後)분풀이’같아서 꺼림칙했다. 민족정기는 독립기념관을 세우고 일왕이라고 부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부순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민족정기를 위해 보다 값진 일은 일제(日帝)에 의해 고통받았던 피해자들을 따뜻이 보살피고 과거를 철저히 규명해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훈을 남기는 일일 것이다.

한일관계에서 우리는 너무 바깥에 드러난 명분과 형식에만 치우쳐온 감이 든다. 이제 각론에 들어가 보다 세밀하게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 우리 정부는 멋있는 정책을 취했다. 일본에 위안부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이라는 공을 던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일본에 두려운 한국의 모습인 것이다.

한일 양국은 엄청난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이미 긴밀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한국경제가 더 이상 추락할 경우 일본 경제도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는 반면, 일본경제가 무너지면 IMF체제의 한국경제는 기사회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받게 된다. 양국은 사실상 운명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동아시아가 처한 미증유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21세기를 동아시아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공유하는 한일간의 협력이 절실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칭문제로 서로 얼굴을 붉힐 때가 아니라고 본다.중국은 한국 못지 않게 일제에 의해 피해를 보았지만 천황을 일왕으로 부르지 않는다. 미국도 천황의 영어표기인 엠페러(Emperor)로 쓴다. 우리도 당당히 천황이라고 부르자.

윤덕민(외교안보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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