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17)

  • 입력 1998년 5월 18일 07시 52분


우리집 작은방에는 각기 세식구가 살고 있었다. 맨 아랫방에는 가발공장에 다니는 처녀 둘 그리고 그 옆방에는 그때 여섯살, 세살 정도의 아이들이 둘씩 있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침에 일을 나가고 나면 아이들은 하루종일 저희들끼리 놀았다.

점심 끼니때가 되면 어머니는 봉순이 언니를 시켜 찬밥 남은 것이나 새로 끓인 수제비를 가져다 주게 했고 아이들은 익숙한 듯 그 찬밥이나 수제비에 저희들끼리 우거지로 만든 김치를 얹어서는 양푼에 머리를 박고 그것을 먹었다. 여름내내 옷이라고는 팬티와 러닝셔츠 밖에 없는 아이들, 그날 아마도 흐린 초여름의 오후였을 것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혼자서 아버지가 사다준 소꿉을 살고 있던 나의 살림살이를 부수고 한 아이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마도 제가 잡은 사마귀인가, 방아깨비인가를 놓치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그저 소꿉을 살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이는 그 사마귄가 방아깨빈가가 나의 소꿉속으로 튀어나가 사라져버렸다고 우겨댔다.

―이 씹팔년이, 니가 게서 풀을 빻고 지랄을 하고 있으니까 방아깨비가 그리로 튀지! 이 망할년아!

아이는 나를 때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빈주먹을 내 얼굴 가까이 휘두르며 말했다. 나는 처음 당해보는 이런 종류의 폭력에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주먹으로 맞은 뺨도 뺨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욕때문에 나는 얼어붙었던 것이다. 그것이 욕이다, 라는 것도 몰랐지만, 무언가 아주 더러운 것을 이미 삼켜버리고 만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봉순이 언니의 부재를 처음 깨닫기 시작했다. 봉순이 언니는, 아랫집으로 이사온 후 멍해졌던 언니는 요즘 부쩍 내 곁에서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언니가 없이 나는 처음으로 부당한 세상과 대면했다.

그 아이가 소리를 치는 동안 우리집의 다른 방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두렵고 슬프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드디어 언니가 이웃집의 식모언니와 우리집에 들어섰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봉순이 언니가 놀라서 달려오자 러닝과 팬티를 온 여름내내 입고 있던 그 아이는 나를 째려보더니 내 얼굴에 침을 퉤 뱉었다.

―재수없는 주인집 딸년! 에이 우라질!

그 아이가 뱉은 침이 내 얼굴로 튀었고 내가 그것을 다 닦을 사이도 없이

―재수없는 주인집 딸년! 우라질!

그 뒤에 서 있던 아이들도 일제히 욕을 하고는 침을 뱉었다. 봉순이 언니가 쫓아가서 그중 한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엉덩이를 패주었지만 아이들은 우우 몰려 저희들끼리 도망을 쳐버렸다. 봉순이 언니는 나를 끌고 수돗가로 다가갔다.

―저 호래비자식놈들 같으니라구, 뭐 저런 옘병할 놈들이 있어. 아줌니 아시면 큰일날라구…. 찡그리지 말구 가만 있어. 침 묻은 거 놔두므는 버짐 피니께.

언니는 내뺨을 열심히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내게 던졌던 말은 마음에 걸려 닦아지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 해석할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억울했고 분했고, 그리고 모욕스러웠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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