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21)

  • 입력 1998년 5월 21일 18시 56분


저들이 끼워만 준다면 한번만이라도 나를 술래를 면하게 해준다면, 절대로 잡히지 않고, 싱싱하게 술래를 노려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이가 게임의 법칙을 위반한 다른 아이를 발견해도, 다른 아이들이 아니라고 하면 나도 아니라고, 다수의 편에서 우기고 싶었다. 그건 적어도 정당하지 않지만, 그건 힘이고, 그건 아주 달콤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젠 봉순이 언니도 더는 나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그들에게 가련한 희생자가 된 모습으로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어졌고 그래,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오기도 솟았다.

내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막막하고 슬픈 줄도 모르고 세탁소 총각과 후미진 골목에서 시시덕거리는 봉순이 언니, 봉순이 언니는 밤마다 라디오 앞에 앉아서 이미자의 노래들을 삐뚜른 연필글씨로 받아 적고는 그것을 연신 불러보고 불러보고 했다. 나는 이제 봉순이 언니와 나 사이에도 어떤 거리가, 마치 내가 더 이상 언니의 등 위에 업히기에는 너무 커버렸듯이 어떤 거리가 생긴 것을 알았고, 이제 봉순이 언니없이 이 악의에 찬 눈동자들을 향해 이 세상의 첫걸음마를 혼자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어슴푸레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물고 어둠속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열심히 외웠다. 아무리 끼여들고 싶었지만 나는 혼자다, 나는 혼자다, 여기서 울면, 여기서 울면, 영원히 바보가 되는 거다, 나는 아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를 그런 주문으로 외웠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뒤돌아보았을 때 골목길 가파른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르스름한 방범등에 전신주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짱구네 가게 앞에 선 수양버들의 이파리가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섬뜩했다.

고요. 검고 긴 고요. 그래도 내 발소리만 크게 울리는 골목길을 나는 두리번거렸다. 공동수도 앞 탱크 뒤나 버드나무 뒤편. 그리고 한참후, 나는 알았다. 아이들이 꼭꼭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붕이 낮은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시장에서 돌아온 제 엄마들과 밥을 먹고 있을 거라는 걸. 그들중 누구도 내가 아직도 술래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무서움을 참아내며 그들을 찾고 있다는 것을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설사 어떤 아이가 있어, 밥을 먹다 말고 문득 아 참 짱이가 있었지,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그도 나를 곧 잊어버릴 것이라는 것을, 내게는 양과자도 있고 레이스 달린 원피스도 있으니 언제나 술래로 세워놓아도 괜찮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 갈래 중에서 끝내 내게 적의만을 드러내려고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아무리 룰을 지켜도 끝내 파울 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악착스러운 진리를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삼십년이나 지난 후였다. 하지만 그 삼십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것이 있다. 이런 경험을 그 이후에도 무수히 반복하면서도 나는 왜 인간이 끝내는 선할 것이라는 것을, 그토록 집요하게 믿고 있었을까. 이런 일이 그 장소의 특수한 사건이라고, 그러니 그때 나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그토록 굳세게 믿고 있었을까? 그건 혹시 현실에 대한 눈가림이며, 회피, 그러므로 결국 도망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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