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칼럼]박동순/정권교체 앞둔 필리핀 정세

  • 입력 1998년 5월 22일 19시 25분


필리핀에서도 야당이 집권하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눈앞에 다가왔다. 11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지 10여일이 지난 지금도 공식 개표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나 약 60%가 개표된 현재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야당소속의 에랍 에스트라다 현부통령이 압도적 지지로 당선될 것이 확실하다.

에스트라다는 6월30일 출범 예정인 새정부의 조각에 이미 착수했다. 배우출신답게 관광장관에는 미스인터내셔널 출신으로 유수 일간지 마닐라 블레틴의 논설위원인 겜마쿠루츠 아라테타를 임명했다. 외무부장관에는 도밍고 시아손 현 외무부장관을 재기용키로 결정했다. 또한 내무 지방정부 장관직을 자신이 직접 겸직해 경찰을 관장함으로써 법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에 앞장설 결의를 보이고 있다.

에스트라다 부통령은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 작은 마을의 시장, 상원의원을 거쳐 92년 야당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이번 선거전에서도 주로 그의 개인 신상문제와 관련해 비판이 많았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큰 싱 대주교의 반대는 거의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는 대다수 일반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는 빈민층의 지지를 얻는데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다. 그는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난한 사람편에 서는 로빈 후드의 인상을 심어왔다. 한번은 돈 많은 실업가의 집에 저녁식사 초청을 받아 갔는데 식사후 그 집에서 일하는 모든 하인들을 오게 해 기념사진을 찍은 일도 있었다.

에스트라다 후보가 지금까지 밝힌 경제정책방향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절대빈곤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토지개혁 및 농업 현대화사업 추진이다. 둘째, 라모스 행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으로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개방정책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라모스 행정부하에서 외국인 투자 제한분야로 되어 있던 소매업 방송통신업 토지소유분야까지도 외국자본에 개방해 아시아 최적의 투자환경을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에스트라다는 19일 필리핀 상공회의소 및 경제인협회 소속 거물 경제인 53명을 초청해 신정부의 경제정책을 설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경제 전문가가 아님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호방한 성격의 일부를 드러내 참석자들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정부규제를 최소로 줄이고 사업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 갈 것이라고 밝히며 기업도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고 빈곤층의 고통 경감을 위해 협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에스트라다 후보의 당선이 확실한 지금 페소화 환율이 계속 안정세를 나타내고 평균 주가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음을 볼 때 에스트라다 후보가 당선될 경우 경제 혼란이 우려된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에스트라다 후보가 당선된 후에도 한국과 필리핀간 경제 통상관계는 계속 확대 발전될 전망이다. 한국은 지난해 필리핀에 26억달러 상당의 상품을 수출하고 7.1억달러 상당을 수입해 약 19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오랫동안 양국의 교역현안이었던 망고 파파야의 공동 검역실험 문제도 이달초 마무리지어졌다. 지난해 7월부터 불어닥친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필리핀에도 영향을 주어 페소화 가치가 하락하고 국내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지만 장기적으로 필리핀에서의 한국상품시장 확대 잠재력은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경제특구에 1백여개가 넘는 우리 업체가 진출해 있고 전력 통신 도로 항만건설 등 각종 인프라사업에도 우리 업체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다. 지리적 근접성, 우수한 노동력, 필리핀인의 사교적 성격 등이 우리 업체들을 필리핀으로 유인하는 요인들이다.

박동순<주 필리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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