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를 기록한 연려실기술에는 태종 이방원의 이름을 딴 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승하할 때 지금 가뭄이 극심하니 내가 죽은 뒤 반드시 비가 오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러 비가 왔는데 그 이후로도 제삿날이면 반드시 비가 왔다.”
31일 1백59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는 KBS ‘용의 눈물’의 마지막 대목이다.
과연 사극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기를 끌었던 이 드라마의 끝을 누가 장식할까.
화면의 주인공은 탤런트 유동근이지만 목소리는 해설자의 몫이다.
‘목소리 스타’로 불리는 성우 이강식.
톤이 굵으면서도 힘찬 그의 목소리는 화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긴박감과 분노 슬픔 등 다양한 분위기를 전달하며 드라마를 살린 숨은 공신이었다.
그는 “시청자를 위한 역사교과서라고 불린 ‘용의 눈물’에 참여한 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면서 “스포트라이트는 스타들의 몫이고 뒷바라지가 성우의 본분”이라고 말했다.
61년 KBS 공채 4기로 성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드라마와 영화 CF를 종횡무진 누비는 대표적 목소리 연기자. 얼굴은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영화가에서는 ‘목소리 신성일’로 통한다.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 80년대 초반까지 신성일이 출연한 작품의 80% 가량을 목소리로 연기했다.
또 영화 ‘애수’의 로버트 테일러,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 등 감성적 색깔의 목소리로 여성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최근 ‘한 치수 더 큰 명품 플러스 원’과 에바스 화장품, 애니콜 등 CF도 그의 목소리를 빌렸다.
“전공은 애정물이지만 30여년 연기경력이어서 사극에도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다만 ‘용의 눈물’은 워낙 화제작이어서 스트레스가 심했지요.”
매주 월요일이면 리허설과 함께 2회분의 녹음이 진행되는 생활이 1년6개월간 반복됐다. 실감나는 목소리 연기를 위해서는 대본은 물론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과 인물의 캐릭터, 이름까지 꼼꼼히 챙겨야 했다.
“실제 현장에서 몸으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화면을 보면서 하는 간접연기이기 때문에 감정과 상상력이 요구됩니다. 사극의 해설자는 사건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객관적인 심판관이죠. 그러나 극적효과를 위해서는 처남을 죽이는 이방원으로, 매형을 원망하는 민무구 형제의 심정이 돼야 합니다.”
이같은 분석을 통해 목소리의 템포와 높이, 색깔이 결정된다. ‘목소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 ‘용의 눈물’과 함께 사는 동안 한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또 그렇게 생활했다.
‘목소리 신성일’로 불릴 때는 하루 20여통의 팬레터를 받았다는 그는 “지금도 전화에서는 30대로 통한다”면서 “젊게 사는 만큼 나이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용의 눈물’을 지켜온 목소리 장인(匠人)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울린다.
〈김갑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