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23)

  • 입력 1998년 5월 25일 07시 07분


여자의 나체가 둥근 붓으로 그려진 그림이 있는 그런 책들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언니나 오빠가 내게 손대지 못하게 하는, 진홍색 당초문양 표지의 계몽사 50권짜리 세계 명작과는 뭐랄까 차원이 다른 세계가 거기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런 책들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봉순이 언니는 가끔 내가 들고 있는 책을 의혹어린 눈으로 흘깃 살펴보기도 했지만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어린 아이가 그 책들에 씌어진 내용들을 설마 다 알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봉순이 언니나 미자 언니가 나를 힐끔거릴 때마다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 되는 거였다. 아직, 집안의 누구도 내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도 어떻게 한글을 읽기 시작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너무 심심했고 그래서 오빠의 초등학교 1학년 국어책을 베끼고 놀았다는 기억 밖에는. 그 일로 인해 오빠에게 머리도 많이 쥐어 박혔지만 어느날 신기하게도 모든 내용이 읽혀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것이 소위 말하는 글자를 ‘깨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안 것도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대개 모든 막내의 운명이 대충 그렇듯이 부모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혼자서 크는 그런 어린 아이였다는 생각도 든다. 레이스 달린 옷도 있고 양과자도 먹고 있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집앞 골목길을 우우, 하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처지와 크게 다른 것도 없었다.

그 아이들의 어미들이 생계를 위해 장터로 가고 우리 어머니는 이제 끼니의 걱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갔다는 것이 달랐을 뿐.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내가 자신들과 같다는 의미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으니 어쨌든 내겐 책 이외에는 눈 둘 곳이 없었던 것이다.

미자언니네 집에서 빈둥거리며 몰래 책들을 읽는 동안, 나는 희미하게나마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상상할 수도 없이 크게 존재하고 있으며 책은 내게,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으려는 그런 것들을 가르쳐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있는 주간지들에는 이름을 외우기도 낯선, 동화책속의 머리카락 노란 제레미나 세라가 아니라 내가 날마다 부딪치고 알고 싶어하는 우리의 아저씨나 언니 오빠들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뭐랄까, 더 생생하고 꿈틀거리는 그런 세계였다.

―그래서 병식씨가 어떻게 했어?

―주인 집에 말해서 집을 사내라고 하랴. 나보고 그집에서 뼈빠지게 일해주었으니께 세탁소차릴 돈이라도 만들어서 나오라는 거여.

―그래, 해달라고 해봐. 짱아 엄마가 그 정도는 해 줄 것 아니니…. 어차피 니가 월급 받고 그 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너 시집 갈 때 한 밑천 해 줄 거라고 약속했다며? 말이 좋아 수양딸이지, 다 돈 안주자는 심보 아니겠니?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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