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부도충격이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에 집중돼 두 은행이 파산위기에 몰리자 외국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정 그룹이나 산업에 돈을 몰아준 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출위험관리의 ABC를 무시했다는 얘기.
이런 지적을 듣는 은행원들은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30대 그룹이 망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라 전체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대마불사(大馬不死)신화’는 한국경제 전체를 지배했으니까요.”
고려대 박경서(朴景緖·경영학과)교수는 “작년초까지 30대 그룹의 대출에 관한 한 대부분의 은행은 ‘위험’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여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보호해준데다 위험을 따져볼 실력도 없었기 때문.
금융업을 흔히 ‘신용산업’이라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위험산업’이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수익이 나오지 않고 위험에 너무 많이 노출되면 존립에 위협을 받는다는 의미.
금융기관에 닥치는 여러 위험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빌려준 돈을 떼이는 신용위험이다. 우리 금융기관들은 이런 위험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작년 한해 이자를 못받거나 떼일 위험이 큰 무수익여신(고정 회수의문 추정손실)은 10조4천억원 증가했다. 올 1∼3월에도 5조4천억원 증가했다. 3월말 현재 무수익여신은 무려 28조원으로 총여신의 7.7%.
시장위험도 피하지 못했다. 작년 한해 주가하락으로 7조4천억원의 평가손을 입었다. 환율이 10% 오르면 3천억원의 환차손을 입게 돼있다.
한국금융연구원 이건호(李建鎬)연구위원장은 이렇게 강조한다.
“한국 금융기관이 살아남으려면 최고경영진이 위험관리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두어야 한다. 위험관리 전문가를 시급히 양성해야 하고 독립된 조직을 두어야 한다.”
선진금융기관들은 어떤가. 신용위험은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철저하게 제도적으로 위험관리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주가 금리 환율 파생상품 등의 가격이 오르내려 손해를 보는 시장위험이 화두다.
한림대 윤석헌(尹碩憲·재무금융학과)교수의 설명.
“금융기관이 하루하루 발생하는 시장위험에 대비하지 않으면 어느날 갑자기 파산할 수 있습니다. 2백33년의 역사를 가진 영국 베어링스은행의 파산이 바로 그런거죠.”
한국 금융기관들에도 강건너 불구경만은 아니다. 주가가 바닥을 모른 채 곤두박질치고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이 하루에도 수백원씩 오르내릴 수 있는 등 시장위험이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다.
위험을 측정하고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진 금융기관들은 ‘위험가치(VaR·Value at Risk)’라는 기법을 활용한다. 시장위험으로 인해 확률적으로 발생가능한 잠재적 손실을 수치로 나타내는 것.
국내 일부 은행도 VaR를 도입, 몇몇 분야에 활용하고 있지만 초보적인 단계다. “VaR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채권수익률, 업종별 부도율 등 축적된 자료가 국내엔 없다”는 것이 조흥은행 종합기획부 강신성(姜信成)차장의 설명.
우리 금융기관의 사정이 어찌됐건 국제 금융계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위험이 현실로 나타날 때를 대비하는 것은 금융기관들의 자발적인 의지이기도 하지만 강제규범 성격을 가진 글로벌 스탠더드로서 자리를 굳혔기 때문.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의 산출방식을 바꾼 ‘신BIS비율’이 바로 그것이다. 즉 BIS비율은 빌려준 돈을 떼이는 신용위험을 주로 관리하기 위한 것인데 여기에다 시장위험까지 감안해 BIS비율을 구해보는 방식이다. 이 때 시장위험을 계산해내는 모형의 하나가 VaR이다.은행감독원도 이같은 국제적인 흐름을 받아들여 2000년중 국내 은행에 신BIS비율을 적용할 계획이다. 이건호연구위원장의 예상.
“현재 국제금융계의 추세를 감안할 때 신BIS비율을 맞추지 못하는 은행은 해외에서 영업을 하지 못하거나 외국금융기관과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천광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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