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김상옥의사 의거 75주년을 맞는다. 늦은 감이 있으나 28일 의사의 동상이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 세워져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이 우러러 보게 되었다.
김상옥의사는 민족 수난기,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義烈)투쟁에 헌신한 수많은 의열사 중에서도 가장 장렬한 의거를 감행한 순국 선열이다. 의열투쟁은 ‘의열단 선언’에 의하지 않더라도 ‘민족의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고귀한 신명을 바쳐 맹렬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김상옥의사는 1890년 1월5일 서울 효제동에서 한 빈곤한 군관(軍官)의 아들로 태어나 주근야독(晝勤夜讀)으로 청운의 뜻을 세웠다.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의사는 경성영어학교에 들어가 신문명(新文明)의 견문을 넓히며 영어를 익혔다.
1912년 23세때 서울 동대문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을 경영하였고 몇년 후에는 말총 모자를 생산하고 양말 장갑 농기구 생산공장을 만들어 국산품 장려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무단치하에서 한국인의 실업이 번창할 리 없었다.
의사는 30세때인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지휘하였고 혁신단을 조직해 ‘혁신공보’를 간행하였다. 나아가 적극적인 의열 투쟁을 결심하고 국내에서 한훈(韓焄) 김동순(金東淳) 등과 암살단을 조직, 총독 이하 일제 하수인의 숙청과 응징을 도모하였다.
▼ 의열단 가입 종로署 폭파
김의사는 이듬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의열 투쟁의 중추기관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당시 국내외에 걸쳐 활동망을 구축하고 투쟁하던 의열단의 목표는 ‘7가살(可殺)’이라고도 불리는 조선 총독 등 일제 하수인을 암살 숙청하고 식민지 통치기구인 총독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등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국내를 드나들며 의열 투쟁을 준비하던 의사는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 신출귀몰(神出鬼沒)하고 장렬무쌍(壯烈無雙))한 의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사는 1923년 1월12일 밤8시를 조금 지나 종로경찰서에 폭탄 하나를 투척하였다.
▼ 자결로 34세 일생 마감
굉음 일성하에 일부 건물이 폭파되고 일제 경찰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이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의 검거 투옥 뿐만아니라 잔인한 고문 학대로 악명을 떨치던 원부(怨府)의 대표 기관이었던 것이다.
현장의 삼엄한 경찰을 따돌리고 후암동으로 근거지를 옮겨 사이토(齋藤)총독의 도륙(屠戮)을 응징하기 위해 준비하던 의사는 5일만인 17일 밀고로 인해 무장한 일경에게 포위되어 일촉즉발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는 쌍권총을 들고 그들과 정면 대결, 도리어 다무라(田村)부장을 총살하고 여러 명의 일경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맹사격을 퍼부으면서 눈덮인 남산을 넘어 수유리 방면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그후 5일 후인 22일 김의사는 효제동 이혜수(李惠受) 동지 집에서 다시 일경과 격전을 벌였다.비상동원령까지 내려진 가운데 1천여명의 무장 경찰들은 우마노(馬野)경찰부장 지휘 아래 의사 주변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김의사는 이번에도 단신으로 쌍권총을 들고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총격전을 벌였다.
3시간반에 걸친 이 격전에서 구리다(栗田)경부를 비롯한 10여명을 살상, 쓰러뜨렸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탄환마저 다하였다.
김의사는 마지막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조국 광복’을 염원하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향년 34세의 장렬한 일생이었다.
이제야 세운 동상 명문(銘文)에 ‘대한인 김상옥 열사, 애국의 횃불이 여기 영원히 타고 있다’고 새겨 넣었다. 혈육으론 태용(泰用) 태정(泰正)의 오누이를 두는데 그쳤으나 숭고한 민족 정기의 후계자는 백대에 미칠 것이다.
윤병석(인하대 명예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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