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27)

  • 입력 1998년 5월 29일 07시 37분


나는 아랫동네로 이사온 이후 처음으로 내 몸을 전율시키는 흥분에 몸을 떨었다.

지금에사 봉순이 언니가 나타나, 짱아르을 자압아 머억자아…하고 으스스한 목소리로 열번을 말한다 해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내 얼굴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 붉게 상기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분은 무참히 깨어져 버렸다. 손가락 끝으로 내 벗은 팔뚝을 쓸어내리던 미자 언니는 대문이 열리는 기척이 나자 발딱 일어섰고, 터널을 빠져 나가 꿈틀꿈틀거리는 동물성의 세계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내 기대는 놀라움으로 변해버렸다. 봉순이 언니가 들어섰다. 미자언니는 갑자기 부산하게 펌프질을 해서는 마당에 물을 좌악 뿌렸다. 나를 데리러 왔던 봉순이 언니는 마루에 놓인 담배 꽁초를 보자 얼굴이 굳어졌다.

―아까 연탄 배달하는 아저씨가 왔었거든….

미자언니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슬그머니 재떨이를 마루 한켠으로 밀어놓았다. 봉순이 언니가 그렇게 화가 난 표정을 나는 처음 보았다. 언니는 잠깐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우선 나를 들쳐 업었다.

나는 이미 또래의 아이들보다 키가 커버려서 언니의 등이 몹시 불편했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담배를 한대 다 피운 것이라든가, 주간지를 읽은 것이라든가, 오줌이 마려운 듯 내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그런 느낌들을 다 들켜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언니의 등은 이제 딱딱해 있었다. 나는 집앞에 와서야 겨우 조그만 소리로 이젠, 내리고 싶어, 하고 말했다. 언니는 대문 앞에서 나를 내려놓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내 팔을 잡아 끌었다. 무서운 힘이었다. 언니는 마치 나를 혼내기 전의 어머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나는 봉순이 언니의 표정을 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하지만 언니는 예전과는 달리 엄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구! 내가 뭘 잘못했어? 언니가 없으니까 심심해서 거기 갔단 말이야!

나는 이제는 서러워서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울었다. 엄마는 내가 아무리 울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지만 봉순이 언니는 아직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내 전략은 잘 적중해서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봉순이 언니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봉순이 언니의 동정을 사려고 울기 시작했지만, 울면 울수록 무서움은 바싹 내 곁으로 쫓아왔다. 담배를 피운 것이라든가, 술을 마신 것이라든가, 온몸이 근질거린 것이라든가, 아무도 내게 그게 금기라고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미 내가 어떤 금기를 넘어 버린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주간지에 나오는 말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봉순이 언니는 서럽게 우는 나를 딱하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 다시는 미자네 집에 가지 말아…. 걘 말야 질이 안좋은 애야 알았지?

<글: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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