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디에이고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임스 쇼프(28)는 논문 주제를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쇼프의 논문 제목은 ‘한국 산업합리화의 정치경제학’. 박정희(朴正熙)정권부터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 시절까지 정책결정의 투명성과 기업에 대한 특혜의 관계를 따져보는 논문이다.
기초자료 수집을 위해 올초부터 서울에 와서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지금까지 건진 게 없다.
“며칠 전 국회에 비리조사 특위의 부실기업 조사 자료를 요청했습니다. 83∼87년에 조사한 것이어서 이미 공개된 자료입니다. 처음엔 ‘외국인이어서 안된다’고 하더군요. 정보공개법상 외국인도 학술 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청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이번엔 ‘국가 기밀사항인데다 기업인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공개할 수 없다’고 나오지 뭐예요.”
쇼프는 그후에도 두차례 더 찾아가 “이미 공개된 자료가 무슨 국가기밀이냐” “부실기업으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의 사생활도 보호할 가치가 있느냐”고 따져봤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은행감독원에 69년 은행 대출관련 통계자료를 요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0년도 더 지난 자료인데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증권감독원도 당연하다는 듯이 “옛날 자료는 없다”며 더 이상의 질문을 막았다.
쇼프는 “미국의 의회나 문서보관소에 가보면 내외국인 차별없이 아무나 출입하고 정보와 자료를 마음껏 열람할 수 있다”며 “아무리 오래된 자료라도 구해보는데 사흘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들려준다. 요즘에는 굳이 방문할 필요도 없이 컴퓨터를 통해 앉은 자리에서 자료를 구해본다는 것.
쇼프는 “한국의 정보공개법은 정보 공개를 적극적으로 막기 위한 법인 것같다”면서 “한국에 논문 자료를 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말리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한숨지었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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