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정책이 이같이 급선회한 것은 5대그룹과 은행의 자율에 맡겨서는 기업개혁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은행권이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한 퇴출 부실기업 리스트에는 30여개의 기업이 올라 있으나 그중 15개 내외만 정리대상이고 나머지는 매각대상으로 분류, 사실상 회생시킨다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스스로 정리방안을 마련토록 한 5대그룹은 퇴출대상 계열사가 아예 없다는 식의 구조조정방안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구조조정의 핵심 대상이 재벌이고 그 계열사인데도 5대그룹 계열사 중 단 한개의 기업도 정리대상에 끼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5대그룹 계열사 가운데 자력회생이 불가능한 기업이 어떤 곳인가는 그룹 스스로가 더 잘 안다. 그런데도 5대그룹은 계열사의 상호지급보증을 통해 마땅히 퇴출시켜야 할 적자기업까지 끌어안고 있다.
은행들이 가능한 한 퇴출기업 수를 줄이려고 하는 고충은 이해할 수 있다. 또 5대그룹의 계열사 감싸기도 무슨 의도인지 잘 안다. 그러나 퇴출대상 기업은 제때 정리하는 것이 은행이나 그룹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부실여신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해 무리하게 부실기업을 끌고 가다가는 더 큰 부실채권을 떠안게 된다. 재벌들도 부실 계열사까지 살리려들면 자칫 그룹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업개혁과 관련, 정부의 강제력이 동원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정부는 구조개혁 시스템만 갖추고 구체적인 구조조정은 가급적 자율에 맡기는 것이 옳다. 그러나 자율적 구조조정이 이런 식이 되어서는 정부개입이 불가피하다. 자율로 안되면 타율로라도 기업개혁을 과감 신속하게 추진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는 경제회생을 위한 외자유치와 국제신인도 제고는 기대할 수 없다. 구조조정 비용 또한 엄청나게 늘어날 뿐이다.
그러나 부실기업 정리에 결코 무리가 뒤따라서는 안된다. 정부개입이 불가피하다 해도 자율원칙의 대전제는 지켜져야 한다. 기업활동이 더욱 위축되거나 주채권은행과의 협의하에 진행중인 자산매각, 외국자본유치 등에 혼선을 빚게 해서는 부작용만 두드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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