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으며 잡담나누기’ ‘토론한다며 커피타임’ ‘집안일 내세워 조기퇴근’. 국책연구소 원장을 지낸 C씨는 연구원들이 하루 3시간 이상을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C씨는 연구원 근무시간을 체크하다가 ‘연구 창의성을 말살한다’는 반발에 부닥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 이후 기업 현장에서 유행처럼 번진 ‘일 더하기’운동. 근무시간은 늘었지만 처리업무량은 늘지 않는 기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출근시간이 오전 9시에서 8시로 1시간 앞당겨진 G사에선 낮 12시 15분전부터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추세다. 그날 할 일을 다 끝마치지 않고 ‘칼퇴근’하는 직원 수가 늘어만 간다.
총수가 “임원들은 오후 11시 이전엔 퇴근할 생각마라”고 엄포를 놓은 D그룹. 많은 임직원들이 종전보다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고 있지만 업무효율이 향상됐다는 평가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니다. 시키지 않으면 안하는 것에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외국기업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꽉짜인 분위기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김주형(金柱亨)LG경제연구원 상무의 80년대 초 미국 생활이야기.
“대학 부설 사회과학연구소에 근무할 때 일입니다. 연구원 20여명의 뒷치닥거리를 50대 여자 직원 한명이 맡았습니다. 비서 타이프라이터 경리일을 하면서 한번도 한가롭게 앉아있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한국 같으면 영락없이 ‘일벌레’라는 딱지가 붙었겠지요. 그런데 이 ‘일벌레’도 매일 오후 5시 퇴근시간이 되면 미련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군요.”
시간 지키기가 사회적인 덕목으로 자리잡은 것은 19세기말 자본주의 시대부터였다는 것이 서울대 임종철(林鍾哲)명예교수의 풀이다. 정해진 시간에 공장에 나와 일을 하는 시간준수 관념이 없었다면 자본주의식 대량생산이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것. 시간개념이 생산성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의미다.
시간관리를 잘하는 쪽은 역시 구미인들. 서구식 스탠더드는 구미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인 반면 시간관리에 엄격하지 못한 아시아식은 생산성을 계속 끌어올리지 못해 경제위기를 만나게 됐다는 평가가 많다. ‘코리안 타임’이란 악평까지 들은 한국도 그 중의 하나다.
아시아경제가 한창 기세를 올리던 94년. 현재는 미 MIT대 교수인 폴 크루그만은 “단순히 사람과 자본을 많이 써서 성장해온 아시아적 성장모델은 벽에 부닥칠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삼성경제연구소 윤순봉(尹淳奉)이사는 “간단히 말해 세사람이 하던 일을 두사람이 하게끔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면 지속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일에 열중하는 분위기와 기업내 시간관리가 지속성장의 필요조건이라는 설명.
80년대 후반 미국 모토롤라나 GE 등 거대기업 사이에 최고의 화두는 스피드경영이었다. 제품개발부터 시장장악까지의 기간을 최소화하자는 것. 이런 노력 끝에 이들은 세계 초우량기업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작업시간만이 아니라 고객의 시간까지 고려하는 기업도 늘었다.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세계 도미노피자점에선 주문한지 30분 지나도록 배달을 못하면 피자값을 깎아준다. 일본 도쿄∼오사카 구간의 신칸센(新幹線)요금과 비행기 요금은 별 차이가 없다. 비행기를 타러 공항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비행기나 고속철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돈이라는 사례다.
시간관리에 왕도(王道)는 없다. 직종이나 기업문화 사업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사무직의 경우 시간관리보다는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정보공유 등으로 의사결정 시간을 줄여가는 게 우량기업들의 추세. 직원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근무시간의 15%를 직원들 마음대로 쓰게 하는 미 3M사의 사례도 눈길을 끈다. 정일재(丁一宰)LG경제연구원 이사는 이렇게 내다본다.
“초우량기업들은 요즘 생산직에서도 현장의 자율과 팀웍을 중시합니다. 근로자 각자에게 시간관리를 맡겨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지요. 작업내용을 구체적으로 설계해놓고 근로자들에게 따르도록 하는 통제식 시간관리 경영이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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