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34)

  • 입력 1998년 6월 4일 22시 12분


언니는 순간 얼굴이 팍,하고 굳어지더니 고개를 푹 수그렸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날 언니 몫의 선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짓던 그런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아주 힘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저도 가면 안될까유? 옆집 할머니가 집 봐준다고 했는데… 다음엔 안따라 갈게유… 그냥 이번 한번만….

하지만 엄마는 대답했다.

―짱이 새로 산 원피스 입혀라!

봉순이 언니는 혼자서 방구석의 장판이 벗겨진 곳에 한참 시선을 주고 있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들이 옷을 벗었다.

어머니는 정말 집을 봐줄 사람이 없어서 언니를 데리고 가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전에,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도 나들이를 갈 때면 이웃집 할머니께 저녁상을 차려드리고 봉순이 언니까지 모두 외출을 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이웃집 할머니는 우리가 새로 산 텔레비전만 틀어드리면 밤이라도 샐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가 봉순이 언니 대신 아버지와 첫 외출을 하는 날 언니는, 어머니 말대로 느려터지고 손 재주도 없지만 억척스레 일도 잘하고 순한 봉순이언니는 대문 앞에서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언니가 얼마나 놀러가고 싶을까, 아버지의 그 까만 차를 얼마나 타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어머니에게 봉순이 언니가 정말 우리 식구 아니냐고 묻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는데 어머니가 내 손을 잡으면서 중얼거렸다.

―쟤가 너무 잘해 주었더니 이젠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려고 하네… 어디라고 지가 따라나서, 나서길, 주제를 알아야지, 참, 너무 잘 대해주어서도 안돼…

이 아랫동네에 와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다.

돈이 있으면 사탕처럼 집도 살수 있고, 돈이 없으면 그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으며 그리고 심지어 사람조차도 미자언니나 정자 언니나, 그리고 우리 봉순이 언니조차도 사실은 돈을 주고 사는 거라는 걸 말이다.

아버지는 자동차에 키를 다시 꽂을 수 있어서 이제 비참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자신이 언젠가 “있는 집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 말한대로 “있는 집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무서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나쁜 주인집 딸년” 이 되어서 서러움을 받았듯이 봉순이 언니가 이 나들이에 함께 갈 수 없는 슬픔 역시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전혀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무언가, 불행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대체 언제서부터 그런 일들을 정해 놓았을까, 나는 엄마에게 손을 잡혀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봉순이 언니는 시무룩한 표정을 거두고 입술을 앙다물더니 나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대문을 꽝 닫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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