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38)

  • 입력 1998년 6월 10일 07시 30분


설마, 엄마가 목욕탕도 아닌 곳에서, 그것도 아무리 어머니의 친구이지만 업이엄마라는 남 앞에서, 이를 잡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다 커버린 봉순이 언니의 옷을 벗겼다는 게 설마 설마, 믿어지지 않았다. 잠시후, 업이 엄마가 핸드백을 들고 안방을 나와 댓돌의 신을 신었다.

―그러길래 내가 어제 족쳐야 된다고 했잖아, 벌써 늦었다구, 꽝 된 거야.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임자가 걜 어떻게 키웠는지 우리가 다 아는데. 어쨌든 임자가 그렇게 무르니까 애들이 분수가 없는 거라구.

업이엄마는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방안에 박혀 있던 봉순이언니는 퉁퉁 부어 더욱 두터워진 눈두덩을 힘주어 뜨고 방에서 나왔다. 봉순이 언니는 말없이 광에서 쌀을 퍼다가 밥을 안치고는 장독에서 된장을 퍼다가 찌개도 끓이고 누룽지도 만들었다. 심란한 표정의 어머니가 안방에 틀어박힌 채 저녁상을 마다했고 우리 형제들하고 봉순이 언니만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감히 봉순이 언니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반찬을 집는 척하고 힐끔 바라보니 봉순이 언니는 소처럼 밥을 꾸역꾸역 씹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그날 밤, 함께 있으면 언니가 멋쩍어 할까봐 나는 안방에서 일부러 늦도록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리고는 잠이 무거운 솜이불처럼 쏟아졌을 때 봉순이 언니와 나의 방으로 건너가 보았다. 언니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였다. 내가 들어오는 기척이 나고 내가 자리에 누웠어도 언니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이불에 덮인 언니의 등이 완강해보였다. 언니가 불쌍했고, 다이아 반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그래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도 언니처럼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이 오지 않았다.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 봉순이 언니를 이토록 남이라고 느껴본 적은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밤 잠에서 깨어보니 봉순이 언니는 없었고, 그밤이 지나고 다시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랫동네 세탁소에는 병식이 총각 대신 머리가 벗어지고 키 작은 주인이 뚱한 얼굴로 쑤우욱 소리를 내며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열흘쯤 지났을까, 업이엄마는 다시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빨간 원피스를 입고 노란 양산을 든 차림이었다. 방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말을 탄 왕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던 내가, 창호지 문고리 밑에 끼워놓은 작은 유리 사이로 내다보니 업이엄마의 뒤꽁무니에 거의 매달린 형상으로 한 소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죽은 맨드라미 빛깔의 보따리를 껴안고 서 있는 소녀의, 깃이 너덜너덜한 초록색 셔츠가 촌스럽고 더워보였다. 업이엄마는 대청 마루에 걸터앉아 어머니가 내미는 미싯가루를 한사발 다 들이켜고는 이놈의 동네는 왜 이렇게 높은지, 올라오면 땀이 한바가지야, 하며 휴우 숨을 내쉬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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