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44)

  • 입력 1998년 6월 16일 07시 37분


“그래두 결국, 당신이 그애 등을 떠민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걔 부모라두 있었으면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낯을 들 뻔 했어?”

어머니는 잠자코 참외를 깎다 말고 힐난하는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자꾸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또 알아요? 그 맹추같은 게 훔쳐놓고 겁이 나니까 도로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나갔을지.”

아버지가 조금만 예민한 사람이었다면 내 가슴이, 아버지의 무릎 한켠에 놓인 내 머리가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어머니의 이야기는 내 희망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공자의 할아버지도 오해가 풀리면 소공자의 어머니를 용서했는데, 열두마리 백조왕자에서 엘리제의 남편도 오해가 풀리자 엘리제를 처형시키지 않고 함께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어머니는 다시 한번 강조해 말하고 있었다. 봉순이 언니가 그것을 훔쳤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아버지에게 들켜버릴까봐 겁이 났다. 아버지가 짱아, 왜 그래, 하고 물으면 아마 나는 깨어나 미친듯이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 내부에 압력을 이기지 못하는 풍선이 하나 있고, 그 풍선이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를 안았고, 건넌방으로 와서 미경이 언니가 잠든 그 방에 나를 내려놓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아마도 그때 알았어야 했으리라.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사람들은 누구나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몰릴 지경만 아니라면,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조차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그렇다고 이미 생각해온 것, 혹은 이랬으면 하는 것만을 원한다는 것을. 제가 그린 지도를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길이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 있다면, 아마 길을 제 지도에 그려진 대로 바꾸고 싶어하면 했지, 실제로 난 길을 따라 지도를 바꾸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이렇게 글을 쓰며 돌이켜보니 내 어린 시절의 지도에 이미 내 인생이 그려져 있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 하는 실수와 내가 자주 겪는 슬픔과 내가 머뭇거리다 돌이키지 못한 정황들이, 인생은 이미 그때 내게 나침반을 표시해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상징적으로 압축된 상태도 아니었고 암호로 가득찬 것도 아닌, 그러나 나는 결코 그 암호와 상징들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이 다시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세월은 한번 가면 그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막연히 믿었던, 그래서 돌이켜 보면 나는 언제나 같은 삶을 같은 항아리 속에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는지.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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