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45)

  • 입력 1998년 6월 17일 08시 07분


어쨌든 나는 집안 누구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봉순이 언니가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도 아닌 바에야 나도 그 일을 거론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가끔 봉순이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께가 미어지는 것처럼 뻐근했고 얼얼했을 뿐.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미경이 언니도 사라져버렸다. 우리식구들이 아마도 외삼촌네 지프를 타고 세검정 골짜기에 놀러갔다 오던 어느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이상하다, 빗장이 잠기지 않았네, 대문을 밀며 들어선 어머니가 순간 낯이 변했고, 미경아, 미경아 부르다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나와 미경이 언니가 쓰던 방으로 들어섰다. 미경이 언니가 언제나 제 물건을 소중히 놓아두었던 죽은 맨드라미 색 보따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선 경대쪽으로 뛰어갔다.

경대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반지랑, 모조 브로치들은 모두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이불 켜켜이 넣어둔 반지와 뒤주 속에 감추어둔 목걸이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은수저들도 수저함 속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참 이상하기도 하네. 손을 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얘가 편지 부치러 우체국 간 건가….

배신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와중에도 어머니는 집안의 소중한 물건들, 그러니까 가장 비싼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싼 물건들에 손을 대지도 않았으니 미경이 언니가 집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아래채, 언니와 오빠의 공부방 쪽에서 우리 언니의 소리가 들렸다.

―엄마, 큰일났어! 옷이 없어, 준이 옷도 내 옷도 없어.

―뭐? 옷이?

어머니가 공부방 쪽으로 뛰어갔다. 오빠와 언니의 옷을 넣어두던 누런 포마이커 서랍장 속의 옷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방 서랍도 텅 비어 있었다. 내 원피스와 타이츠와 구두, 머리 묶는 방울까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옷 말고 또 뭐 없어진 것 있나 봐라.

우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과 모양의 도자기 저금통도 그대로 있었고 책도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공부방 쪽을 기웃거려보니 그쪽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저금통도, 외삼촌이 월남에서 보내준 언니의 소니 카세트라디오도 그대로 있었다. 다만 캐비닛 속에 걸려 있던 우리들의 옷만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그때 우리 언니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엄마, 내 교복! 내 교복이 없어졌어!

―뭐 교복을?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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