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국제통화기금(IMF)한파의 탓을 전직 대통령에게 돌리곤 한다. 실직자와 노인들로 만원인 탑골공원 그리고 서울역앞 광장에서는 김영삼 전대통령을 성토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이런 민심이 납치범의 대담성을 유발한 한 원인이 아닐까. 만일 김 전대통령이 경제적 실책을 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이 국정에 개입하지 않고, 돈에 대해 철저히 청렴했더라도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까. 대선자금과 권력을 맞바꿔 건설 특혜라도 따보려 했던 기업주들의 계산이 오씨의 경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이 법정에 선 광경이 떠올랐다.
많은 대선자금을 받고 퇴임시에도 거액을 남겼던 전직 대통령의 항변은 무엇이었던가. 노전대통령은 “그 돈이 그렇게 많이 남을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립내각 때문에 많이 남게 된 겁니다. 그 돈은 정상적인 국가 예산하고 다르게 비공식적으로 모은 것이지만 저는 저대로 그 돈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쓰려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뇌물성에 대해서는 펄쩍 뛰며 부인했다. 어떻게 대통령이 특정업자에게 혜택을 약속하고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돈문제는 비밀이 지켜질 수가 없다.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권력의 옷을 벗고 나약한 피고인이 되자 재벌회장들은 일단 돈을 준 사실을 전부 시인했다.
삼성의 이건희회장은 3공화국말부터 세금 비슷하게 관례적으로 돈을 주어왔다고 했다. 그 돈의 의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최소한 불이익은 없게 해달라는 취지였다고 했다.
대우 김우중회장은 대통령이 국가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예산에 반영되지 않는 돈의 용도가 많아 그 돈을 개별기업으로부터 관례적으로 받아 쓰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대림의 이준용회장은 검사가 “대통령에게 돈을 준 것은 대형사업에 있어 대림을 봐달라고 준 것이 아니냐”고 묻자 “여러가지 변명 하고 싶지 않습니다. 뉘우치고 있습니다”라고 사실을 인정했다.
이처럼 그동안 우리의 정치구조나 선거제도는 숙명적으로 부패한 정치인을 만들어왔다. 선거때부터 후보들은 부정부패의 원죄를 지니고 공직에 들어섰던 것이다. 자금을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는 법이다. 김전대통령은 그 인과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과감히 전직 대통령들을 법의 제단위에 올렸었다. 퇴임한 지금의 심정은 과연 노전대통령의 법정 진술과 어떻게 다를까.
18일은 92년 대통령 선거의 선거법상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뇌물죄는 공소시효가 10년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아래의 사람과 법위의 사람이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김전대통령은 납치범을 우려해 가족의 경호를 강화하기보다 등돌린 민심을 위무하고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사과와 해명을 해야 할 것이다.
엄상익<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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