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안 내용은 충격적이다. 9인승 이하 자동차는 2005년까지 1㎞를 달릴 때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을 현행 1백70g에서 1백20g 이하로 줄여야 한다. 연비로 따지면 가솔린 1ℓ당 주행거리를 14㎞에서 20㎞까지 높여야 한다는 계산.
배출량은 제조회사의 판매실적을 기준으로 전 차종을 가중평균한 절대치로 계산하기 때문에 대형차 생산이 많은 쪽이 불리하다. 제조회사들은 생산차종 전략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짜야 할 판이다. 독일의 벤츠사는 이미 소형차 생산에 들어갔다.
유럽차만 비상이 걸린 것이 아니다. EU 규제대상에 수입차도 포함된다. 지난해 1백55만대를 수출, 유럽 전체 판매대수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재미를 본 일본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지금까지 대형차 위주로 유럽시장을 뚫어온 도요타와 혼다는 재빨리 1천∼1천3백㏄급 소형차를 유럽시장에 내놓기로 계획을 바꿨다.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의 예에서 보듯이 이제 CO2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이나 제품은 세계 시장에 발을 못 붙이게 됐다. 폭우 가뭄 한파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후 현상이 CO2 배출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 현상 탓이라고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나 공장이 뿜어낸 CO2는 대표적인 온실가스로 지구를 이불처럼 덮고있어 기온을 높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피해는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십년 후 닥쳐올 폐해는 어떤 재앙보다도 끔찍한 수준이지요. 식량위기가 오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연안지역이 물에 잠깁니다. 선진국들이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경쟁적으로 CO2 배출 억제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모든 산업정책은 CO2 배출량을 감안해 세워지고 있고 이것이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외교통상부 최석영·崔晳泳 환경과학과장)
지구 온난화 방지라는 ‘글로벌한’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구가 바로 92년 채택된 유엔 기후변화협약. 1백60여개 협약 가입국들은 지난해 12월 일본 교토(京都)에 모여 ‘교토 의정서’를 채택했다.
일단 선진국들부터 CO2를 줄이는 의무를 지기로 했다. 미국 일본 영국 등 협약상 38개 선진국은 2008∼2012년 5년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을 90년(기준년도)에 비해 평균 5.2% 줄여야 한다.
다음은 개발도상국 차례. 올 11월 브라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릴 4차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개도국의 감축 의무가 본격적으로 거론될 전망이다. 개도국 중에서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인 한국과 멕시코가 가장 먼저 매를 맞아야 한다.
개도국이 CO2 배출을 줄이는 것은 경제성장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개도국은 중화학공업 중심의 에너지 다소비 산업구조이기 때문.
화석연료 의존도가 90%에 가까운 한국. CO2 감축의무를 받아들일 경우 공장을 제대로 돌리지 못해 경제성장에 치명타를 입게된다. 최악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010년 국내총생산(GDP)이 80년대 중반 수준으로 후퇴할 수도 있다. 기후변화협약을 ‘환경 IMF’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CO2감축경쟁’에 선진국들은 큰 돈을 쓰며 앞서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라 해수면이 상승할 경우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연안지역이 물에 잠겨 피해가 큰 일본. 93년 시작된 일본의 신에너지 정책인 ‘뉴 선샤인 프로그램(NSP)’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저공해 에너지 차량에 연료를 공급하는 주유소인 ‘에코 스테이션’은 이미 실용화단계에 들어섰다. 전기자동차 천연가스자동차 등 3천6백여대의 저공해차들이 56곳의 에코 스테이션에서 연료를 공급받으며 굴러다니고 있다.
EU는 2010년까지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을 95년 수준의 60∼70%로 감축하는 ‘오토&오일 프로그램’을 가동중이다. 옥스퍼드 아테네 피렌체 바르셀로나 리스본 스톡홀름 등 유럽의 6개 주요도시는 청정연료 자동차 개발을 유도하기 위해 배출가스가 심한 차량의 도심 진입과 통행을 금지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국내 업계의 입장을 대변해 온실가스 감축 압력에 저항했던 산업자원부 신성철(申聖澈)자원정책과장은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쌀시장 개방 때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기후변화 협약에도 빗장을 열어주고 CO2 감축의무를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경제위기로 경제성장률이나 에너지 이용률이 둔화한 이 때를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에너지 소비패턴을 철저히 구조조정하지 않으면 환경을 내세운 경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요.”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글로벌 스탠더드 취재팀
△홍권희차장(경제부·팀장) △천광암 박현진기자(경제부) △박래정 이희성기자(정보산업부) △이진영기자(사회부) △유윤종기자(문화부) △윤경은기자(생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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