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56)

  • 입력 1998년 6월 29일 07시 56분


나는 언니와 마주 앉아서 왕사탕을 또로록 또로록 소리가 나게 굴려먹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달콤한 것이 입에서 녹아감에 따라 이제껏 느껴왔던 모든 힘들었던 일들이 함께 사탕처럼 그저 녹아드는 것도 같았다. 봉순이 언니도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예전처럼 언니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언니가 씨익 웃으며 나를 안았다. 나는 언니의 허리를 껴안으며 예전처럼 간지럼을 태우려고 했었다. 그러면 언니의 저 핏기 없는 얼굴에 조금이라도 홍조가 피지 않을까. 내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언니가 날 두고 그렇게 가버렸어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난 그저 예전의 짱아라는 걸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나는 까르륵 웃으며 이불 속으로 얼굴을 박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불 속으로 들이민 내 머리 위로 축축한 피비린내가 후욱하고 끼쳐왔고, 동시에 내 손에 두툼하고 헐렁한 언니의 배가 만져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 이불 속에서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누운 이 여자, 얼굴은 봉순이 언니인데 몸은 이미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이 여자. 나는 흙속에 우연히 손을 넣었다가 뭉클뭉클한 벌레라도 만져버린 것처럼 얼른 손을 떼고 엉거주춤 이불 밖으로 머리를 뺐다. 내 머리칼 올올이 그 축축한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늦은 모양인지 구민의 ‘전설따라 삼천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흰 빛이 내려와 박씨부인은 태기가 생겼더라.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모양이 보통 범상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라는 구민의 목소리가 우리들의 어색한 머리맡을 울리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울려고 했을 것이었다.

―…우리 짱이가 젤로 보고 싶더라. 짱이도 언니가 많이 보고 싶었지?”

당황해서 울어버리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언니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두, 언니가 보구 싶었어, 라고 말하려 했지만 갑자기 목이 콱 메어왔다. 방안이 떠나가도록 비명을 지르고 싶기도 했고 봉순이 언니 품에 예전처럼 얼굴을 묻고 언니 이제 가지마, 아무데도 가지마, 하면서 울고도 싶었다. 하지만 온몸이 식초에 담긴 것처럼 그저 시큰시큰 했다.

피비린내와 헐렁하고 두터운 뱃가죽. 정말로 모든 것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 그림책에 박힌 금박글씨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괜찮아, 짱아. 괜찮아, 다 괜찮다구”

그래, 그것은 봉순이 언니가 꼭 나를 향해 하던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언니의 나이 열아홉, 아마도 인생의 한 벼랑에까지 몰려갔다가 겨우 되돌아선 한 소녀의 자기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봉순이 언니에게서 될 수 있는대로 몸을 멀리하려고 애쓰면서, 하지만 그걸 봉순이 언니가 다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면서 잠이 드는 척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밤새, 언니가 꿈결에서 간간이 흐드득 흐드득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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