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빅뱅/中企자금이사의 25시]『내돈두고 부도걱정』

  • 입력 1998년 7월 1일 19시 48분


“은행이 영업정지돼 돈을 찾을 수 없어요. 당장 갚아야할 어음이 있는데 어떻게 하죠.”

“특단의 상황이니까 그런 어음은 일괄 연장조치가 있을거예요.”

“은행에서는 그런거 모른대요. 무조건 막으라는 거예요.”

“글쎄, 좀 기다려보세요. 조치가 있을 겁니다.”

“회사가 부도 일보직전인데 기다리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중견제조업체인 C사의 자금담당 김모이사는 지난달 30일 오전9시 금융감독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다급한 상황을 털어놨다. 29일까지 막아야할 어음 50억원을 30일 오전까지 막지못하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나마 새벽까지 시간을 번 것이 다행이었다.

‘퇴출’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1차부도는 곧 사형선고인데 금감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이사 허리춤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거래은행 대부계 직원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낮 12시까지 입금시키세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기업들이 마구 쓰러지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어디서 50억원이나 되는 돈을 만들라는 말인가.

김이사는 왜 곤경에 빠졌나.

퇴출은행 발표가 있기 전인 27일 지방 A은행은 C사가 발행한 기업어음(CP) 50억원어치를 교환에 돌렸다.

다행히 오랫동안 거래를 터온 다른 금융기관이 C사의 CP를 매입하고 대금은 A은행계좌에 곧바로 입금했다.

김이사는 29일 주거래은행인 K은행에 돌아오는 어음 50억원은 A은행에 입금된 CP대금으로 해결할 요량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자금결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29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A은행이 퇴출대상으로 전격 발표된 것이다. 김이사는 한편으로 걱정이 됐지만 정부가 ‘입출금 등 웬만한 거래는 정상적으로 이뤄진다’고 했기에 그럴 줄로 믿었다.

그러나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퇴출은행의 반발로 전산망 가동이 중단돼 모든 은행업무가 마비됐다는 것이다.

“어, A은행에서 돈을 찾아야 하는데….” 김이사는 즉각 주거래은행에 다급한 사정을 설명했다. ‘일단 막으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행에서 한동안 실랑이를 벌인 끝에 30일 0시까지, 이어 오전 5시까지 두차례의 연장조치를 받았다. 김이사는 ‘설마 부도를 내겠어. 입금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하며 스스로 위안했다.

회사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샜다. 정부는 5개 퇴출은행이 지급하기로 돼있는 어음과 수표를 교환대상에서 제외했을뿐 C사의 경우처럼 퇴출은행에 자금이 묶인 기업은 안중에도 없었다.

김이사는 사무실을 뛰쳐나왔다. 은행 종금사 상호신용금고 등 돈을 다루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갔다. 하늘도 도왔을까, 30일 오후3시 거래은행 당좌계좌에 50억원을 겨우 입금시켰다.

안도의 순간은 잠시. 김이사의 피말리는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일 20억원, 2일 10억원…. 막아야 할 어음이 한다발이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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