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60)

  • 입력 1998년 7월 2일 19시 18분


나는 예전처럼 밤이면 봉순이언니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무서운 걸루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봉순이 언니는 글쎄, 내가 아는 건 다 해줬다니께 그런다, 하면서도 지난번 이야기를 조금씩만 바꾸어 가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언니는 나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영아언니 방에 가서 글자가 빽빽한 책들을 읽고 그 이야기를 어린 내가 알아듣도록 바꾸어 해주었다고 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어느날부터인가 시멘트 바른 하얀 마당을 비추던 창백한 햇살이 노릇노릇해지면서 봄은 오고 있었다. 아랫집 스피츠가 하얀 강아지들을 여섯마리나 낳았고, 얼마동안 털을 곤두세우던 동네강아지들도 언니를 보고 짖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근거리던 동네사람들도, 우리 봉순이 봄이 오니까 이뻐지네, 하고 말을 건넸다. 그것이 얼마만큼 참혹한 것이든 어떤 기억도, 봉순이 언니를 짓밟기에는 너무 이른, 봉순이 언니는 스무살, 때는 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봉순이언니를 앞세우고 이른 아침부터 미장원엘 다녀왔다. 들어서는 봉순이 언니의 머리는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처럼 둥그레했다. 요즘 유행하는 그 바가지 머리라고 했다. 봉순이 언니는 며칠 전 어머니와 사다놓은 연분홍 투피스로 갈아 입었다. 그러자 그녀는 정말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에 한 은은한 화장은 살짝 곰보를 가리고 있었고, 진달래빛 루즈 색깔이 좀 그렇긴 했지만 어쨌든 거리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처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와아, 봉순이 언니 이쁘다”

내가 말했지만 봉순이 언니는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 약속장소는 알지? 그 사람 아침 차 타고 올라온다드라. 요 아래 궁다방으로 하려다가 니가 부끄러워 할 것 같아서 굴레방다리 거 송림소아과 옆에 양지다방으로 정했다. 그쪽에서는 모래네 이모가 나와 있을 거니까 걱정말고…. 우리 봉순이도 이렇게 차려놓으니 정말 이쁘네. 여자는 돈하고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뻐진다더니 참, 자, 이제 출발해라. 늦겠다.”

하지만 봉순이 언니는 영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 듯했다. 언니는 건넌방 툇마루에 걸터 앉아 새로 사 신은 밤색 구두코를 마당에 이리저리 비벼댔다.

“…아줌니 저, 안 나가면 안될까요?”

“아니 또 그게 무슨 소리니? 어쨌든 그쪽은 짱이 이모 먼 시동생 뻘되는 사람인데, 니가 안나가면 이모 꼴이 뭐가 돼?… 아유. 난 니가 이렇게 터무니 없이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그냥 가슴이 철렁하면서 심장이 하루 종일 뛴다. 대체 왜 또 마음이 변했어?”

“아줌마 저 시집 안갈래요.”

“뭐?”

“짱이 봐주믄서 밥하구 그냥 여기서 살래요.”

언니는 어린아이같은 음성이었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대청에 걸터 앉았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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