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김용택/정호승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입력 1998년 7월 2일 19시 32분


아침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내가 근무하는 산골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세 그루 미루나무가 이슬비에 젖었다가는 바람이 불면 크게 흔들린다. 운동장 가엔 샛노란 천인국꽃이 피어 이슬비에 젖고, 이따금 뻐꾹새가 이산 저 산에서 운다. 뻐꾹새 소리를 들으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읽는다. 바람이 흔들리는 나무들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며 일어섰다가는 쓰러지고 쓰러졌다가는 도로 일어선다.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꽃지는 저녁’).

아름다운 사랑도 아름다운 이별도 없는 이 삭막한 시절, 메말라가는 내가슴을 적시는 ‘꽃지는 저녁’은 나를 헉, 허리 꺾이게 한다. 저 깊은 어느 그리운 곳에서부터 배 고파 오는 이 허리 꺾이는 허기와 솟아나는 눈물을 아는 이들은 알리라.

시는 외로움과 시절의 배고픔과 사랑의 그리움 속에서 간절하게 솟아나는 맑은 생수이다. 어떤 것이든 간절한 것은 절실한 것이고 절실한 것은 절절하다. 구구절절 우리들의 메마른 가슴을 적셔 온 정호승 시인의 시들은 몹시도 쓸쓸하고 외롭다. 그러나 그의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목소리는 저녁 종소리가 되어 힘든 하루를 살아온 우리들의 고통을 은은하게 달랜다.

‘문득/보고 싶어서/전화 할 사람’이 없는 사람은 이 시집을 보지 말라. 사랑을 기다리며 언 땅에서 얼마나 춥게 언 발을 비벼야 사랑이 별이 되어 뜨는가를 모르는 이들은 이 시집을 보지 말라. 정호승 시인의 시는 그렇게 긴 겨울밤을 지내고 마침내 그 기다림과 견딤이 별이 되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신 새벽 두 무릎을 꿇고 사랑을 바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의 시집 아무 페이지나 그냥 펴고 아무 행이나 읽어도 우리들의 가슴을 간절함으로 이끈다.

나는 그가 울지마라고 하면 눈물이 난다. 그가 울면서 나에게 울지마라고 한 것 같아서이다. 살면서 외로움에 떨고, 외로움에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는 그런 사람들의 어깨를 따스한 손길로 쓸어준다. 이 시집을 읽은 이들은 바람이 불면 소리가 날 사랑의 풍경을 하나씩 달게 것이다. ‘먼데서 바람이 불어와/풍경 소리 들리면/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 간줄 알아라’(‘풍경 달다’).

이슬비 오는 운동장가 마루나무 잎이 가만히 흔들린다. 어? 내 님이 왔는감네.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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