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천재 이창호⑩]독주…누가 「돌부처 아성」깰까?

  • 입력 1998년 7월 5일 19시 54분


대국날이면 아침을 거르곤 한다. 대국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복기(復碁)를 하는데 이겼을 때 걸리는 시간은 30분 가량. 그러나 지면 한 시간도, 두 시간도 좋다. 받아들일 수 없는 패배. 해법이 나올 때까지 그는 복기에 매달린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까지 깊은 잠에 빠져든다.

‘세계 최강의 바둑’으로 언제나 승리의 환성을 받는 것 같은 이창호(李昌鎬)9단이지만 패배의 사신(死神)에 가위 눌리기는 범인(凡人)들이나 마찬가지다.

“뇌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서봉수(徐奉洙)9단은 최근 국제대회에서 미국인 마이클 레드먼드 8단에게 반집패를 당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 어떤 프로도 패배란 죽음처럼 어둡고 괴롭고 쓰라리기만 하다.

투혼이 맞부딪는 대결장, 사각(四角)의 정글은 권투에만 있는 게 아니다. 황금을 다투는 야수처럼 프로기사들이 으르렁거리는 또 다른 사각의 정글이 바둑판이다. 프로기사의 운명이기에 오직 한 사람의 최고수만 남아 명예와 돈을 차지하는 대국장을 향해 돌진하고 이윽고 더 힘센 자가 나타나면 회생의 기약조차 없이 사라져야하는 약육강식의 냉혈 지대. 여기에 인생을 건 프로기사들인지라 누가 ‘바둑 황제’ 이창호를 노리는 저격수일런지 모른다.

이9단에게 “라이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실례가 아닐 수 없다.

라이벌이란 대체 뭔가. 나이 성장배경 성적 등 여러 측면에서 숙명처럼 팽팽한 대립과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이 솟는 상대. 과거와 현재를 같이 해왔고 당분간 미래를 함께 할 동반자. 이런 조건을 갖추고 이9단과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혈투를 벌이고 있는 상대가 지금 누가 있단 말인가.

일본기계의 일인자로 활약중인 조치훈(趙治勳)9단과 동문의 선배이자 연적(戀敵)이었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9단의 사이, 한국기계에 유명한 10여년의 ‘조―서시대’를 함께 열었던 조훈현(曺薰鉉)과 서봉수(徐奉洙)9단. 이같은 라이벌이 이9단에게는 없는 것이다.

한때 라이벌로 거론됐던 유창혁(劉昌赫)9단이나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9단은 어느새 먼 거리로 물러나고 있고 라이벌로 주목받던 ‘중국의 이창호’ 창하오(常昊)8단은 최근 연전연패를 기록하며 역부족을 실감하고 있다. ‘영원한 스승’ 조훈현만이 줄기차게 정상을 다투고 있을 뿐.

이9단의 대 조훈현 프로통산 전적은 7월1일 현재 147승 97패, 올들어서는 9승4패. 성적으로는 가장 근접하지만 ‘영원한 스승’에게 ‘라이벌’이란 표현은 가당치 않다.

차라리 이9단이 누구를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 여기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때에 따라 다르게 답변한다. 어떨 때는 조훈현, 때로는 유창혁을 꼽는다. 그리고 이따금은 “요즘 후배들은 다 잘 두잖아요”라며 두리뭉실 넘어간다. 그러면서 대국 상대가 된 이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예우 차원일 수 있다. 진정으로 까다롭게 여기는 기사가 현재 없다는 함축이 아닐까. 그만큼 자신있다는 얘기다.

이9단에게 ‘바둑의 역사’란 다만 한판 한판 코앞에 닥친 대국의 결과가 쌓여서 생긴 결과일 뿐. 성장기라고 할 92년 한일 신예기사 대결에서 그를 연파해 명성에 흠집을 냈던 요다9단과의 ‘과거’는 더 계속되지 않는다. 하기야 요즘엔 붙어보고 싶어도 기회가 많지 않다. 미래를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는 자신있게 맞이해야 하는, 곧 다가올 현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우지는 않아요. 아무래도 외국기사들과 대결하는 국제기전을 비중있게 생각하고 거기에 신경을 집중하지요.”

올해의 목표에 대한 답을 들어보아도 그가 ‘현재형’ 사고방식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이창호의 라이벌’에 관한 질문을 바꿔보자. 누가 탄환처럼 빨리 그를 추격할 준족(駿足)인가 하는 물음으로.

“후배기사들 중 ‘색깔있는 바둑’을 두는 기사는 누구입니까.”

조훈현9단이 제기한 ‘색깔론’이 생각나 이9단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이 없는 아류(亞流)로는 결코 정상에 설 수 없다. 조9단은 물론 ‘바둑의 발견’이란 이색적인 책을 펴낸 문용직(文容直)4단과 ‘우주류’바둑 조대현(趙大賢)8단도 ‘색깔론’을 편다. 얼마전까지 차세대 주자로 꼽히던 C6단이나 Y6단, 현재 화려한 성적을 내고 있는 스무살 안팎의 M4단 K4단은 ‘제2의 이창호’로 불릴 정도로 ‘침착무쌍’한 스타일. 이래서는 결코 이창호를 능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9단은 ‘색깔있는 바둑’을 두는 후배기사로 최철한(崔哲翰·13)초단 이세돌(李世乭·15)2단 이희성(李熙星·16)2단 등 3명을 들었다. 예비 후계자로 여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기계 나아가 이창호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임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셈이다.

이9단이 좋아하는 기사는 바둑스타일로는 일본 기계에서 기성(棋聖)으로 추앙하는 위칭위엔(吳淸源)9단, 삶의 측면에서는 린하이펑(林海峰)9단. 모두 두터운 기풍의 소유자이자 포석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이론가들이다. 이9단은 스스로 약점이라고 밝히는 포석 감각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9단의 후계자가 갖출 최소한의 조건은 섬세함을 갖춘 공격형 바둑에다 포석에 대단히 강한 능력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현재 활약 중인 어떤 기사인지, 혹은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이창호를 꺾을 이는 어쩌면 강보(襁褓)에 싸여있는 아기일 수도 있다. 75년 조훈현이 천하를 호령하기 시작할 무렵 호남벌에서 이창호가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울렸던 것 처럼.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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