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난번에 병식이 만날 때도 그랬잖아?
몽롱히 젖어 드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는 봉순이 언니의 말을 자르며 미자언니가 대꾸했다.
―내가? 내가 그랬어? 아니야 병식씨 땐 좀 달랐어. 그땐 아니다,는 느낌이 더 많았어. 게다가 병식씬 여자한테 잘해주는 그런 타입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번은 아니야. 사람이 참 따뜻하구 가엾은 거야. 날 만나기 위해서 누가 아침부터 버스타구 오래도록 달려서 온 일이 있었니? 왠지 난 그 사람하고 먼 옛날부터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거 같애
봉순이 언니도 주간지의 ‘감동수기’를 너무 많이 읽은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나오는 여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 여자들도 그 남자들의 정성에 감복해서 언제나 감동했으니까. 왠일인지, 그 감동수기의 주인공들과 너무 닮은 봉순이언니의 그 대사들이 걸렸으나 언니는 연분홍색 투피스처럼 발그레해진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사람이 어떻든? 모래네 이모말로는 그쪽에서는 니가 맘에 드는 눈치라고 하든데
봉순이 언니는 걷어놓은 빨래를 개다 말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채 히죽 웃었다. 어머니는 그런 봉순이 언니의 표정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글쎄 그렇게 서로 첫인상이 좋았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마는 열번을 아는 것 같아도 모르는 게 사람 맘이란다. 내가 내 맘도 모를 때가 많은 데 다른 사람 마음이야 하물며 어떻겠니? 홀아비라는 거는 그렇다쳐도, 이렇게도 살펴보고 저렇게도 살펴보고 사람들 여럿 있는 데서도 보고 혼자 놓고도 보고 술먹은 것도 보고 안먹은 것도 보고 이리저리 뜯어봐야 할 텐데 서로 사는 데가 멀어서 그게 안될까 그게 좀 걱정이다 싶은데… 어쨌든 절대 서둘러서는 안된다. 알았지? 누가 뭐래도 넌 처녀고 그 쪽은 홀아비니까 그렇게 호락호락하면 안되는 거야. 여자가 비싸게 굴수룩 남자는 여자를 더 귀하게 아는 거야. 알겠니?
시집을 가서 사는 게 최고라고 말해놓고 그렇게 말해놓고 어머니는 막상 봉순이 언니가 상대를 당겨하는 눈치를 보이자 슬그머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지는 아줌니가 하라는 대루 할께요.
봉순이 언니는 새로 시집을 오기라도 한 색시처럼 수줍게 말했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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