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심수관 『시련속에서도 姓씨 400년 간직』

  • 입력 1998년 7월 9일 19시 48분


일민미술관(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4백년만의 귀향―일본속에 꽃피운 심수관가(家) 도예전’의 주인공 14대 심수관(沈壽官)씨가 이종석(李種奭)일민문화재단 상임이사와 7일 오후 대담을 가졌다.

4백년 동안 일본에서 어떻게 한국의 성(姓)씨를 지니고 살았으며, 가업(家業)을 이어 왔을까? 심씨는 4백년만의 ‘귀향보고회’를 갖는 벅찬 감동과 심수관가 4백년에 얽힌 이야기를 소상히 전했다.

이종석〓6일 개막식이 성대하게 끝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참석했는데 감회가 어떠셨습니까.

심수관〓상상할 수 없는 하루였습니다. 대통령이 온다는 것은 한국 국민 모두가 환영한다는 뜻인데….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이〓4백년은 정말 장구한 세월입니다. 그 4백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심〓4백년제는 아버님인 13대 심수관의 염원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병상에서 “앞으로 33년이 지나면 선대가 일본에 건너온 지 4백년이 되는데 그때가 되면 선조들이 이 나라(일본)에 와서 겪은 애환과 시련, 괴로움을 위로하는 제를 올려주기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이〓한국인들은 심수관가가 조선의 성씨를 계속 쓰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왔다는 점에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심〓자기 몸 속에 흐르고 있는 피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로부터 “너의 피는 한국의 피다. 그러니까 한국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늘 듣고 자랐습니다.

이〓이번 도예전에서 선보이는 초대 심당길(沈當吉)의 망건과 일본에 끌려갈 때 가져간 소설 ‘숙향전’외에도 선생의 자택 부근에 있는 단군을 모시는 사당 옥산궁은 4백년 내내 한국인의 민족혼을 불사르겠다는 결의의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심〓그렇습니다. 조상들이 한국인의 피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길을 다졌고 후대는 그 길을 따라갔던 것이지요. 한번은 일본의 문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가 제 집에 와서 4백년간의 작품을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네 선조들은 심장이 두개 있군요. 하나는 바다 건너 한국을 생각하는 심장과 또 하나는 일본속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심장말입니다.”

이〓선생께서 1965년 한국에 처음 와 심씨의 집성촌인 경북 청송에 갔을 때의 감동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듣고 싶습니다.

심〓청송에 가서 성묘길에 나섰을 때 뒤를 보니 심씨 친척들이 개미처럼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 행렬이 대지의 끝, 아니 지구의 끝까지 뻗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일본에서는 늘 쓸쓸하고 망향의 정에 젖어 있었는데 지금은 내 친척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고 뭉클했습니다.

이〓청송 심씨 집안은 조선시대 명신(名臣)들도 많았고 양반 가문으로서 손꼽힙니다.

심〓심씨 종친회에 참석했을 때 집안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집안은 양반 가문인데 너희는 일본에 가서 도자기를 굽느냐. 그것도 한해 두해도 아니고 4백년이나 긴 세월을”.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어쩔줄 몰랐습니다. 한 직업을 14대 이어온 것은 서양 같으면 작위를 받을 만한 일일텐데요.

이〓직업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심〓이번 전시 작품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도자기의 기본 품격은 대단합니다. 다만 어느 시대부터 상당히 일본화되어 우리 도예와는 거리감이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문화 풍토가 낳은 소산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심〓그렇습니다. 도자기는 그 나라의 문화와 풍토를 등에 업고 만들어집니다. 일본에서 한국 도자기와 똑같이 만들려고 애썼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은 사족(士族)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 예우를 흡족하게 생각했으면 귀화를 했음직도 합니다만.

심〓돈과 안락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꿈과 뜻이 있어야 합니다. 선조 도공들은 먹고 사는 데 급급했던 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민족적인 긍지를 갖고 살았습니다.

이〓선생께서 성장하던 시기는 일본군국주의시대와 전후 패전기, 즉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때인데 혹시 심한 고통을 받지나 않으셨는지요.

심〓한일간의 친선을 도모해야할 시점에서 유쾌하지 않은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 정상이 아니었던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단련시켰고 그것이 한국을 다시 인식하고 사랑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리〓허 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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