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정신적 무국적자

  • 입력 1998년 7월 13일 19시 33분


때로는 역사도 갑자기 바뀐다. 철옹성의 체제도 어느 날 맥없이 무너진다. 그러나 역사에 돌연은 없다. 그만한 까닭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돌연사(突然死)도 따져보면 당연사(當然死)라고 하는 것처럼.

세계 최고의 활력을 구가하는 것 같던 동아시아 경제도 짧은 기간에 동반추락했다. 지난해 7월 태국 바트화(貨) 붕괴부터 불과 몇달 사이의 일이었다. 여러 나라가 내외의 취약 요인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터에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의 국제통화기금(IMF)보고서는 뜻밖의 사실을 폭로한다. ‘헤지펀드와 금융시장 다이내믹스’라는 보고서다. 이에 따르면 태국에서 헤지펀드들이 일제히 바트를 팔고 빠져나간 것은 바트 붕괴 2개월 전인 작년 5월부터였다. 그러나 헤지펀드보다 먼저 바트 팔기에 나선 것은 태국 국내기업과 은행들이었다. 헤지펀드는 국내기업과 은행을 뒤따라갔다. 92년 영국 파운드위기 때와는 크게 다르다. 영국에서는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 같은 헤지펀드들이 파운드 팔기를 주도했다.

태국의 많은 기업가와 투자가는 졸부들이다. 국가경제가 위험기미를 보이자 그들은 자산을 환금, 그것을 외환시장에 팔아 미국에 빼돌렸다. 정경유착으로 만든 관료인맥은 그들에게 경제정보를 미리 주고 재산도피를 도왔다. 비슷한 일이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도 벌어졌다. 그것이 동남아통화 동반붕괴의 중요한 한가지 요인이 됐다.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는 그만큼 파괴적이다. 그들은 정신적 무국적자(無國籍者)다.

한국경제의 침체로 도쿄(東京)의 한국술집도, 옌볜(延邊)의 조선족 사회도 크게 위축됐다. 그러나 호놀룰루의 교포 여행업자는 색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한동안 어려웠으나 요즘에는 먹고 살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목적으로 미국에 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며칠 노는 한국인들 덕분에 장사가 제법 된다는 설명이다. 그들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재산도피가 이뤄지고 있다는 힌트는 된다.

관계당국은 일부 부유층의 재산도피를 조사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당국은 도피재산의 규모를 2백억달러로 추산한다. 그러나 업계 일각에서는 4백억달러로 보기도 한다. 나라 전체의 올 한해 무역흑자목표와 맞먹는다. 그 가운데는 한국경제가 IMF체제로 들어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 직전에 돈을 빼돌린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도 정신적 무국적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세금을 내지 않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 사람들도 그에 속한다.

경제구조를 왜곡시키면서까지 재산을 늘린 장본인들이 경제위기가 닥치자 돈을 빼돌렸다면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이중 배신이다. 지금 우리의 이웃들은 거리에 내몰리고 굶으면서도 한가닥 희망을 붙잡으려 몸부림치고 있다. 그런 이웃들에게 정신적 무국적자들이 주는 것은 배신감과 절망감 이외에 무엇인가. 그런 배신감과 절망감이 쌓이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며 국난극복에는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공동체의 돌연사도 돌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당국은 철저히 조사해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진 사람들’이 반성해야 한다.

이낙연<논설위원>naky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