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정재서/「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 입력 1998년 7월 23일 19시 27분


▼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정옥자 금장태 외 지음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야기다. 그런데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실감나는 것은 실재했던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마천의 걸작 ‘사기’ 중에서 생동감 넘치고 재미있는 부분도 인물 이야기인 ‘열전’이다.

역사상 여러 계층의 인물이 존재해왔지만 선비를 뜻하는 ‘사(士)’계층은 과거 동아시아 국가에서 다른 어느 계층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 본래 문무를 겸비한 남성 지식인이었던 ‘사’는 후대에 이르러 문인 학자를 의미했다가 조선시대에는 사실상 유학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는 우리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정도전으로부터 신채호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대표적 선비 23명에 대한 열전이라 할 이 책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는 필자들의 면면과 각각의 주제들이 잘도 상합(相合)하여 읽어볼 맘이 생기게 하거니와 일단 책을 펼치면 그 어려운 성리학의 논쟁들조차도 한 편의 이야기로 화하여 술술 읽힌다. 아울러 23명의 대유(大儒)들이 시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잘 정리된 조선의 지성사를 접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각 인물의 전기 다음에 붙은 논찬 형식의 글은 그 인물을 또다른 인간적 견지에서 생각케 해준다. 정도전과 정몽주, 최명길과 김상헌, 송시열과 허목 등으로 설정된 라이벌 관계는 얼마나 흥미로운가.

의리와 변통, 명분과 실리, 이 영원한 이항대립 사이에서 고뇌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했던 옛 선비들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이른바 동아시아적 가치가 우선인가, 세계화가 선행되어야 하는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순 없는 것일까. 대체로 실리보다 명분이 앞섰던 조선 선비들의 강개한 삶은 실리 쪽으로만 치닫고 있는 현재의 국면에 적절한 균형감각을 일깨워주지 않을까.

이 책은 또한 적소(適所)에 아취(雅趣)있는 그림들이 안배되어 글 내용이 더욱 돋보인다. 뿐만 아니다. 정인홍과 남명학(南冥學)에 대한 재평가,예송(禮訟)논쟁에 대한 재인식 등도 종래 우리의 속견을 벗어난 신선한 관점들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왜 ‘선비가 시대를 만든다’로 하지 않고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로 했을까. 이 궁핍한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 오늘의 지도층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그것은 청백하고 공평무사한 옛 선비들의 정신이기 때문이리라.

정재서(이화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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