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6)

  • 입력 1998년 7월 24일 19시 20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⑥

원래 이 동네 사람인데 이웃 도시에 나가 부동산 사무실을 냈다는 남자가 설명을 했다.

댐 공사를 하고 있는 비포장길을 따라 4킬로미터쯤 들어가자 계곡 안의 마을이 드러났다. 산골 마을들이 보통 그렇듯이 버스가 서는 길가에 양철 지붕을 잇댄 방앗간이 있고 맞은편 길가엔 담배포를 내고 있는 좁다란 기와지붕 집이 있었다. 그리고 길을 중심으로 20호쯤 되어 보이는 아래 마을이 있고 못 하나를 지나 15호쯤 되어 보이는 윗마을이 있었다. 부동산 업자는 원래 방앗간과 담배포가 한 담을 두른 집이었는데 길이 마당 가운데로 나면서 이런 모양이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윗마을 건너편의 산언덕을 향해 서둘러 손짓했다.

―저 집이에요. 언덕 위에 있는 집 중 두번째 하얀색 벽돌집.

언덕 위에 겨울 저녁의 사양을 받고 있는 새하얀 집이 조그맣게 보였다. 해가 지는 무렵이어서 이제 막 가로등 불이 켜졌고, 마을의 집들도 차례로 불을 켰다. 아직은 빛을 발하지 않는, 그저 그 집엔 사람이 산다는 신호를 보내는 듯한 가냘프고 창백한 빛들.

늦겨울의 시골은 지푸라기를 덮고 잠든 빈 들판과 갈색 덤불들로 인해 오히려 따스해 보였다. 덤불 속에는 새빨간 까치밥 열매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산골의 밭들은 보리가 자라나고 있어,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연한 푸른빛이었다. 나는 담배를 빼내어 불을 붙였다. 창을 열고 연기를 내뱉자, 알싸한 공기가 날카로운 이빨처럼 달려들어 목을 무는 듯했다.

마을을 지나자 다시 포장되지 않은 길이 나타났다. 그 언덕길을 따라 허리가 꺾어진 늙은 노파가 검은 염소 세 마리를 끌고 구르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기 염소 두 마리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차를 피해 노파가 길가에 멈추자 염소들도 가장자리로 붙어 섰다. 메마른 풀덤불 같은 재색 머리카락과 판화 칼로 그은 듯한 굵은 주름살들, 거의 90도로 굽은 허리, 저녁 빛에 무슨 색깔인지 알 수 없는 낡고 두꺼운 스웨터와 몸뻬 위에 짙은 색의 몽당 치마를 입고 버선과 털신을 신은 모습이었다.

나는 목을 빼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분명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내부로부터 치솟는 손 쓸 수 없는 불길함과 고절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서 세상과 좀더 힘껏 싸워보지 못하고, 급기야는 처자식을 이끌고 이렇게도 깊은 산골로 도망을 치다니….

이렇게 이른 나이에, 아직은 세상에서 뒹굴며 승부를 내야 하지 않을까, 한번 들어오면 나도 이 산골에서 저렇게 늙도록 살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흔은 어느 새 노파가 되어 90도로 허리가 꺾인 채 저녁에 염소를 끌고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집으로 혼자 돌아가고, 나 역시 순식간에 늙어, 한나절 동안 걸어 내려가 장터에서 술을 마시고, 또 한나절 동안 걸어 올라오다가 오줌을 누어 겨울 솜바지를 적실지도 모른다는 불길하고도 서러운 생각이.

집은 5백평의 땅 위에 35평 건평으로 지은 집이었다. 최근에는 잘 쓰지 않는 작은 벽돌집이라는 점이 특별했다. 흰색 벽돌집에 지붕은 녹색 아스팔트 싱글이었다. 마을에서 뚝 떨어져 언덕 위에 서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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