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승주/햇볕논쟁을 넘어서

  • 입력 1998년 7월 28일 19시 27분


71년 겨울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안보보좌관 키신저를 비밀리에 베이징(北京)으로 보냈다. 50년 한국전쟁 이래 20년 이상 지속된 적대관계를 청산하려는 의도였다.

그 다음해 2월에는 닉슨 자신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을 만나 그때까지 적국이었던 중국과 화해하고 협력관계 수립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중―미(中―美)간 화해에는 몇가지 역설적인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중국과의 화해를 이룬 사람이 미국에서도 우익 지도자로 알려진 닉슨대통령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대중(對中)정책의 급전환이라는 중대사가 미국답지 않게 공개적 논의를 거치지 않고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중정책 전환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우리의 대북(對北)정책 전환과 좋은 대조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 이른바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다. 햇볕정책은 정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으나 정경(政經)분리,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미국 등 우방국과 북한의 관계개선 권장 등을 근간으로 하는 ‘포용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정책이 처음 5개월동안은 큰 논란 없이 받아들여지는가 했으나 잠수정 사건, 무장 침투원 사망 표류 사건이 겹치면서 우리나라의 보수층뿐만 아니라 중간층으로부터도 많은 회의와 비판의 소리가 일고 있다.

햇볕정책에 관한 논쟁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정책의 타당성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둘째는 그것을 무조건 지지 옹호하는 주장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 방법과 운용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다.

햇볕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즉 북한이 적대적인 대남(對南)정책을 견지하는 한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경분리는 불가능하다는 것, 대북 원조는 물론 미―북관계 개선, 심지어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등 일방적인 양보와 시혜는 북한의 협조 대신 오만을 조장한다는 것 그리고 북한의 경직되고 폐쇄된 체제라는 ‘외투’는 ‘햇볕’이라는 온건한 정책으로 벗길 수 없다는 것 등이다.

반면 햇볕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지금 단계에서 그밖의 또다른 선택이 없음을 지적한다. 즉 북한체제를 강제로 개방 변화시킬 수는 없으므로 유연한 정책만이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은 미국 등을 포함한 세계의 추세라는 점을 강조한다. 햇볕정책이 북한의 상존하는 무력 위협과 도발을 간과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이들은 그 정책이 철저한 안보태세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영구한 평화와 안보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응수한다.

그러나 국민 전체로 볼 때 햇볕정책의 근본적 전제와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에 햇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 그것이 마치 새로 발견한 묘약(妙藥)인 것처럼 선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햇볕정책이라는 표현은 현 정부가 처음 만들어낸 것도, 처음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표현을 공식화하고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정책의 취지 자체를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는 보수 안정세력을 포함한 일반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북한에는 자기네 체제를 소멸시키려 한다는 극도의 거부감을 갖도록 하였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평화적이고 협조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그것을 환영하기는커녕 그에 반발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전보다 더 공격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 정부 자체의 평가다. 이것은 햇볕정책의 공론화(公論化)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대신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론적으로 햇볕이라는 틀 안의 여러 정책과 조치는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햇볕정책이라는 패키지 속에 넣고 그 내용보다 포장지를 선전하다 보면 내용물 자체에 대한 신뢰감마저 훼손시킬 수 있다. 정부는 어쨌거나 햇볕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재삼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포장지에 쓰인 상품의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이 역작용을 할 때는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그에 대한 논쟁 때문에 내용물 자체를 희석시키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는 햇볕정책의 논쟁을 지양하고 남북간의 교류 활성화와 관계개선에 정력을 집중할 때다.

한승주<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전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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