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上 배심원평결]경제권 달라는 남편

  • 입력 1998년 7월 29일 19시 35분


▼아내생각▼

공정미(31·주부·서울 노원구 상계동)

94년 12월 한 회계법인의 비서실에 근무하다가 연애결혼했어요. 맞벌이를 하는 동안에 통장은 각자 관리하기로 합의했죠. 일정한 액수만 생활비로 내놓고 각자 저축도 하고 용돈도 쓰자는 거였어요.

96년 8월 남편이 핀란드 헬싱키로 파견근무를 떠나면서 저도 직장을 그만두고 함께 갔습니다. 거기서는 돈 쓸 일도 많지 않고 쇼핑도 항상 함께 해서 누가 경제권을 갖느냐 하는 문제로 신경쓸 일이 없었어요.

지난해 8월 귀국한 뒤 처음으로 ‘통장관리권’을 놓고 일전을 벌였죠. 이제 전업주부인 만큼 당연히 통장은 제 몫이라고 주장했고 남편도 결국 마지못해 승낙했어요.

IMF시대에 가벼워진 남편 월급봉투로 7개월된 아들 성주까지 키우느라 철저한 ‘긴축재정’을 펼쳤죠. 외출복 한벌을 안사입고 비싼 퍼머 한번 안했어요.

그런데 얼마전 남편이 불쑥 “통장을 넘겨볼 생각이 없느냐”고 떠보는 거예요. 뭐 ‘재테크’를 해보겠다나요. 적은 돈을 쪼개쓰느라 골머리를 앓다보면 차라리 저도 통장을 넘기고 생활비를 타쓰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땐가요. 통장은 저에게 맡기고 일에만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남편생각▼

류신규(34·신무림제지 기획관리과장)

아내가 통장을 깔끔하게 관리해온 공로를 부정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한달 20만원의 용돈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알 겁니다.

후배들과 술자리를 가진 뒤 아내에게 “20만원만…”하고 손벌린다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가끔은 “누가 번 돈인데”하는 생각에 억울하기까지 해요.

통장을 직접 관리하는 친구들의 얘길 들으면 부럽습니다.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만큼 활력과 자신감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남들처럼 ‘비자금’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아내나 아들, 처가에 선물을 하고 싶어도 손을 벌려야 하거든요.

또 요즘은 ‘긴축’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동료들을 보면 얼마 안되는 월급을 쪼개 채권 주식 등에 투자하고 있어요. 저도 조금만 신경쓰면 은행에 월급을 꼭꼭 쟁여두는 것보다는 많은 이익을 올릴 자신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내보다는 정보가 많지 않겠어요.

제가 돈을 펑펑 써대거나 위험한 투자를 할 사람도 아니고요. IMF시대 같은 비상상황일수록 가정경제의 ‘통수권’을 가장에게 몰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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