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22)

  • 입력 1998년 8월 12일 19시 18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22)

미흔은 아무일 없이 3일만에 돌아왔고, 다시 긴 잠을 잤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해졌다. 무감각하다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자폐적인 사람들이 그렇듯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놀라지 않았다.

전에 살던 도시에서도 꽤나 충격적인 소문들은 더러 있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서도 계모가 네 살 된 아이를, 오줌을 못 가리고 자주 운다고 한밤중에 자루에 넣어 폐쇄된 쓰레기 집하장에 던져 넣어 죽을 때까지 꺼내지 않은 일이 있었다. 아이가 며칠동안 기운 없이 울었는데도 일층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나는 고양이 울음 소리로 알고 짜증스러워만 했다고 한다.

아파트 근처에서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 사건도 종종 있었다. 그 사건이 더 경악스러운 것은 버스 정류장에 다른 사람들과 서 있던 여자를 한 남자가 다짜고짜 끌고가기 시작했는데도 아무도 말리거나 최소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여자는 저항을 하면서 거의 바닥에 누워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길에 있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말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여자는 결국 아파트 근처의 야산에서 온 몸에 자상을 입고 강간당한 채로 발견되었다.

미흔은 그런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에 대해서도 묘하게 평화로운 태도로 말했다. 냉소도 아니고, 무관심도 아닌 매우 일상적인 태도. 말하자면 그런 폭력성에 익숙해 있는 사람의 피학적인 태도였다. 그나마도 그렇게 가볍게 언급한 뒤로는 곧바로 무심해졌고 되풀이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부희 사건에 대해서는 달랐다. 미흔은 부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만일 좀더 예민한 종류의 인간이었다면 그때, 미흔이 빠져들던 그 이해할 길 없는 매혹에 대해서 어떤 불길함을 느꼈을까? 나는 미흔이 단조로운 시골마을에 와서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걸린 집단 히스테리에 감염된 거라고 속으로 약간 우스워했다. 무엇에 관한 것이건 관심사가 생긴 건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아무도 모를 그녀의 그 깊은 마음속에서 어떤 색채가 밖으로 번져 나오고 있었던 일종의 증후였던 게 분명하다.

부희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부희와 목재소를 같이 다니며 친하게 지낸 여자들의 발설과 경찰서의 취조실에서 흘러나온 흥미진진한 자백들, 사람들이 느낀 인상과 단편적인 기억, 그리고 상상력이 한데 뒤엉켜 마치 고전과 같은 커다란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 마을 사람들처럼 미흔도 여름 내내 그 불행한 부희의 사건에 거의 도취되어 있었다. 물론 도취되었다고 해서 절대로 즐겁게 재잘댔던 것은 아니다. 미흔은 그런 적이 없었다. 도취조차 오히려 좀 음울했다. 그녀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흡사 낙담이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나지막한 음성으로 느닷없이 중얼거리곤 했다.

―부희는 열 아홉 살 때 그 집에 왔어. 만삭의 몸으로. 겨우 열 아홉 살이었는데. 농한기동안 도시의아파트공사판에서 일했던 그 집 남자가 다음 해 봄에 돌아오면서 데리고 온 거야. 그 남자는 서른 네 살이 되도록 결혼을 못한 노총각이었지. 지금도 그렇지만 농촌 총각이 결혼하기 어려웠을 때야. 그때 이 마을에도 중국 여자를 데려와서 결혼한 노총각이 있었대. 그런데 그 집은 형편이 어려워 목돈 마련 할 엄두를 못냈나봐.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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