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주현/국회가 국민의 뜻을 저버린다면…

  • 입력 1998년 8월 14일 07시 22분


며칠전 사회복지관련 모임에서 한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인격을 반추해 봅니다. 나는 진정으로 실직을 당한 사람이나 수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고 있는가. 그들의 아픔을 진정 나의 아픔으로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그가 되돌아보는 윤리적 감수성을 우리들은, 우리의 지도자들은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국민이 국회와 정치권에 대해 불신하고 분개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포기했다. 윤리적인 감수성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정치권에 대해 아무리 무슨 이야기를 한들 허공에서 메아리로 돌아올 뿐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입법청원운동이 일어나고 세비 가압류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존경심마저 느껴진다. 아직도 국회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바로잡아보겠다고 하는 시민들의 끈질긴 노력이 그나마 우리 사회의 소망이요 위안인 것이다.

▼ 불붙는 議員소환운동 ▼

이미 국회는 국민을 버렸다. 국회가 국민을 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을 버리고도, 아니 국민을 버려야만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정당 저 정당 눈치빠르게 가서 줄을 잘 서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정당 안에서 눈치있게 힘있는 계보를 파악해서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하며, 지역의 유지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돈을 잘 돌려 조직을 잘 관리해야 한다. 거기에 거의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시간이 남으면 지역이권사업을 따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래야 공천을 보장받고 선거에서 표가 나온다.

국민 전체를 위한 정책이나 나라의 장래를 위한 제도를 만드는 데 열성을 다하는 의원은 아무래도 현재의 정치판에서는 적응력이 부족한, 경쟁력이 약한 얼뜨기 국회의원이 되기 십상이다. 지금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수백만의 실직자들과 수해로 인한 재해민들이 얼마나 큰 시련에 부닥쳐 있는지를 모르는 국회의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의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정치권 내의 역학관계와 자신들의 영역지키기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내 정치생명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실직자들이, 재해민들이 내 정치생명을 보장해줄 것인가. 천만에!’ 이런 판단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 일말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차라리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고 그 소송에서 필자의 주장이 허위임이 입증되어 패배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국회는 국민을 버렸고,그래서 국민도 국회를 버렸다. 국민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며 아예 투표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 국회를 퇴출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는 예사로 나오고 있고, 어쨌든 대의기관으로서의 입법기관은 있어야 할테니 ‘제2의 국회’를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대의기관의 양 당사자가 서로를 저버리고 멀어지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이제 어떻게든 서로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한다. 억지로라도 국회의원들이 정치인들이 국민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지금의 정치인들이 너무 부유하다. 가난했던 사람들도 정치를 하면 부유해지는 것 같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이념도, 윤리적 감수성도 우리에겐 없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 정치인이 될 수 있고정치인이 되고 나서도 부유해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 국민정당 만들어야 ▼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이 너도나도 정당인이 되어서 정당운영에 관여하는 국민정당으로, 정당이 서로 다른 이념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정책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정책정당으로 되어야 국민과 국회와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 국민정당이 되려면 정당가입 자격제한을 최대한 철폐하고 정당내 후보를 당원들이 선출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정책정당이 되려면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보수당과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진보당의 구도로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정당에 대해서도 투표를 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곧바로 도입해야 한다. 국민과 국회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민주주의국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박주현(변호사·경실련 상임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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