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러시아 유산 「대국주의」

  • 입력 1998년 8월 17일 20시 09분


정보담당 외교관 추방전으로 차가워진 한국―러시아관계가 구시대유물 ‘대국주의’에 또 한번 걷어차였다. 러시아측은 최근 비공식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가 추방한 아브람킨 참사관을 재입국시키라고 압박하고 있다는 보도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한번 기피인물로 출국시킨 외교관을 다시 받아들이라는 요구는 2차대전 이전의 포함(砲艦)외교 시절에나 있을 법한 대국주의적 횡포다.

▼러시아 언론들이 자국 외무장관의 ‘술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것도 이례적이다. 러시아외무장관은 한―러외무장관 회담 때의 아브람킨‘재입국 추후검토 약속’을‘재입국합의’로 기정사실화했다. 러시아 언론들은 한국측이 이 합의를 파기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올 가을 외교통상부장관과 내년 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러시아방문 예정이 취소될 것같다고 썼다.

▼이 보도들은 홍순영(洪淳瑛)신임외통부장관이 아파나시예프 주한 러시아대사에게 전한 통보내용도 왜곡했다. 홍장관이 한―러관계의 갈등해소를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을 “화해를 서두르지 않고 냉각시킬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기존 갈등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해결하겠다는 홍장관의 언급에 대해 “지금까지 합의된 모든 사항을 취소할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외교갈등은 소분야별 마찰, 고위수준 분쟁, 전반적 외교관계 냉각으로 나뉜다. 따라서 갈등 해소책은 수위에 따라 달라야 한다. 정상회담 취소까지 거론한 것은 이런 룰을 무시한 결과다. 상대방 말을 거꾸로 뒤집어 짓누르는 구시대 열강외교로는 해결될 일이 없다. 패권주의자 나폴레옹도 “사건이 외교정책을 지배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한―러관계의 중요성에 비추어 사건을 정리하도록 숙고해야 할 것이다.

〈김재홍 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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